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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정동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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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날의 독설(毒舌), 개를 생각하다

세계일보 문화기획- 문자로 보는 세상 19복날의 독설(毒舌), 개를 생각하다삼복(三伏)이 지나갔다. 그런데도 덥다. 지구가 열을 덮고 있어서 그렇단다. 그렇다. 덮으면 더운 게 당연한 이치다. 심리적 차원에서 보면 리우올림픽의 열기가 더해졌기 때문에 더 덥게 느껴진다. 8.15 광복절 이전에 오던 말복이 올해는 광복절 다음 날에 왔다. 왠지 한자로는 다르지만, 광복도 복날로 느껴진다. 지난해와 같이 올해도 월복(越伏)이었다. 월복이란 초복에서 시작된 말복이 달을 건너 들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자면 초복부터 말복까지 30일 간격이지만, 날수로는 31일이다.알다시피 하지(夏至) 지나 셋째 경일(庚日)과 넷째 경일에 각각 초복과 중복이 들고, 입추(立秋) 지나 첫째 경일에 말복이 든다. 따라서 초복과 중복은 일정하게 10일 간격이지만 중복과 말복 사이는 입추 날짜에 따라서 10일 또는 20일 간격으로 바뀐다. 보통은 해를 갈마들며 바뀌는데, 예년과 달리 작년과 올해는 연거푸 20일 간격이었다. 그러니 마음으로 느끼는 더위는 더 길게 다가온다. 말복이 지났음에도 여지없이 국민안전처에서는 오늘도 거의 전국에 걸쳐 불안한 폭염 경보를 내렸다.복날은 일진으로 봐서 경일(庚日)로 정해져 있다. ‘경(庚)’ 자의 고문자 형태는 ‘탈곡’하는 모습으로 음양오행으로 보면 금(金)의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계절로는 가을에 해당한다. 가을을 생각하며 더위를 참으라는 의미인가 보다. 하지를 지나면 태양은 실제로 기울기 시작한다. 하지만 날씨는 더 뜨겁다. 이는 군불을 지필 때보다 지피고 난 뒤의 구들장이 더 뜨거운 것과 같은 이치리라. 우리 민속에 ‘복달임’이 있다. ‘복땜’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복날에 그해의 더위를 물리치는 뜻으로 고기로 탕을 끓여 먹으며 원기를 회복하는 일을 가리킨다. 궁중에서는 주로 쇠고기를 넣고 끓이는 얼큰한 육개장을 먹고, 민간에서는 삼계탕이나 보신탕을 끓여 먹었다. 보신탕은 본래 개장국이라 불렸으나 애견인들의 비호감을 염려하여 영양탕, 사철탕 등과 같이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 북녘에서는 직설적으로 개고기국이라 했으나 1985년 김일성의 명령으로 단고기국으로 개명했단다. 뭐라 했든 더위를 피하고자 술과 음식을 마련하여 산간계곡에 들어가 탁족(濯足)하며 복달임하는 장면에는 한 폭의 그림과 같은 낭만이 스며있었다.그런데, 삼복(三伏)의 ‘엎드릴 복(伏)’ 자에 ‘개 견(犬)’ 자가 붙어 있어서 복날을 보신탕 먹는 날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근거가 없다. 이는 복(伏) 자의 근원을 캐 보면 알 수 있다. 개는 가축 중에서 인류가 가장 먼저 길들인 짐승이라 생각한다. 물론 개도 소, 돼지나 닭처럼 길러서 잡아먹기도 했겠지만, 수렵사회의 근본적인 개 사육의 목적은 ‘사냥’ 곧, ‘수렵(狩獵)’이었다. 수렵(狩獵)이라 할 때, ‘사냥할 수(狩)’와 ‘사냥할 렵(獵)’에 모두 ‘개 견(犬,犭)’ 자가 붙어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중국에서는 수렵(狩獵)을 간체자로 수렵(狩猎)으로 쓰고, 사파리를 수렵여행(狩猎旅行)이라 한다. 또 개고기를 구육(狗肉)이라고 하는 것처럼 견(犬)보다는 구(狗) 자를 주로 쓴다. 구(狗)는 구부정한 강아지의 의미로 비하하는 뜻이 담겨있다.동남아시아에서 길들인 가마우지가 물고기를 사냥하여 주인에게 물어다 주는 것처럼, 개도 화살로 잡은 사냥감을 주인에게 물어다 준다. 그리고 먹을거리를 달라고 주인에게 꼬리를 치며 엉너리를 부리는 모습이 ‘엎드릴 복(伏)’ 자이다. 여기에서 복(伏)은 ‘굴복하다, 복종하다’ 등의 뜻으로 확대된다. 복종(服從)이라 할 때의 ‘옷 복(服)’ 자의 발음도 복(伏)과 같으며 복종을 요구하기 위해서 주인은 아랫사람에게 같은 옷을 입힌다. 그러고 보니 인간은 개의 복종에서 먹을 복(福)을 챙기기도 하는구나. 문자학자에 따라서는 복(伏) 자를 ‘개처럼 낮은 자세로 사냥감을 공격할 기회를 노리고 있는 사람’의 형상으로 보기도 한다. 사자와 호랑이도 먹잇감을 사냥할 때는 몸을 잔뜩 웅크리고 목표물에 최대한 가까이 접근하는 것은 본능일 것이다.개는 후각과 청각이 매우 뛰어나다. 우거진 잡풀 속에서 사냥감을 찾아 뛰어다니는 개의 모습이 ‘우거질 망(莽)’ 자인데, 개의 뛰어난 후각이 이를 놓칠 리 없다. 개 코를 뜻하는 글자가 ‘냄새 취(臭)’이다. 개는 특출한 후각과 청각 능력으로 인하여 시각장애인 안내는 물론 마약 및 폭약 탐지에도 이용된다. 집안에 함께 있던 개가 기척이 있으면 돌연 밖으로 뛰어나가는 모습이 ‘갑자기 돌(突)’이고, 그때 짖는 동작이 ‘짖을 폐(吠)’이다. 주인에게 충성스러운 개를 일러 충견(忠犬)이라 하고, 또 개나 말처럼 윗사람이나 나라에 바치는 노력을 ‘견마지로(犬馬之勞)’라 한다. 이러한 개도 최후에는 불 위에 몸을 던져 인간의 보신을 위해 희생하니, 이러한 감동과 충격의 광경이 바로 ‘그러할 연(然)’ 자이다. 그러나 지금은 예와 달리 개 이외에도 먹을 게 풍족하다. 이제는 여태까지의 개의 노고와 희생을 ‘개똥같이’ 여긴 데 대하여 반성하고 감사의 뜻을 기려야 한다. 인간은 ‘개뿔’ 잘나지도 못했으면서 ‘개새끼’니 하며 ‘개소리’나 하고, 저는 ‘개’만도 못하면서 세상만사 ‘개떡같이’ 여기고, 오나가나 ‘개지랄’털며 발 닿는 곳마다 ‘개판’을 만들더니, ‘개좆’도 모르는 게 이제 더는 ‘개망신’ 당하지 않으려고, 개의 지위를 ‘애완견(愛玩犬)’을 지나 ‘반려견(伴侶犬)’까지 올려놓았다. 그나마 천만다행이다. 반려의 지위는 함께 살아가는 가족과 같은 개념으로 정서적으로 서로 의지하며 희로애락을 함께한다는 뜻이렷다. 그러고 보니 영화 ‘워낭소리’에서는 소도 반려동물이었네.개는 일찍이 인간과 더불어 살면서 교감해 왔고, 죽어서도 온몸을 바쳐 인간에게 희생하므로 가축 중에 가장 가까운 반려가 되었다. 그래서 필자의 생각에 ‘개’는 ‘가까이’라는 말과 어원을 같이하지 않을까 하고 추정한다. 그도 그럴 것이 ‘개’의 고어는 ‘가히’였다. 그리고 이 말은 ‘가히> 가이> 개’의 변화를 거쳐 왔다. 그래서 말 새끼는 ‘망아지’, 소 새끼는 ‘송아지’라 하듯이 가히 새끼는 ‘강아지’가 되는 것이다. 만약 고어에서도 개라고 불렀다면 우리는 지금 ‘갱아지’라 해야 옳을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개는 인간을 지키려고 집에 불이 나도 떠나지 않고 그대로 집과 함께 타버려서 지금은 땀샘이 없는 개가 되었단다. 살아서 털이 많이 빠질 때는 더러운 ‘개털’ 같다고 욕을 먹었지만, 죽어서는 자신의 꼬리를 댕강 잘라 빗자루로 사용하게 하고, 자신의 가죽으로는 장구의 한쪽 북면이 되어 인간에게 맑고 짱짱한 소리를 들려준다. 죽어서도 너의 피부는 ‘복날 개 패듯이’ 마구 두들겨 맞아, 스스로 아픔으로써 남에게 ‘개즐거움’을 주나니... 인간은 화증이 나면 욕을 퍼부을 때마다 너의 이름을 빌려 스트레스를 풀지만 그런데도 너는 죽을 때까지 주인을 지키며 서로 눈빛을 나누다가 주인 곁에서 최후를 맞이한다. 복날 안팎으로 떠오른 개 이미지는 다양했다. 복날에 살아남으려고 호랑이 모습으로 염색한 개, ‘삼복이 다가오니 우야만 좋노’하고 눈물 흘리는 개,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온다. 인간이란 도대체 알다가도 모를 짐승이다. 이 세상에 똥을 좋아하는 개는 없어. 그런데 인간은 나를 똥개라고 부르지’하고 푸념하는 개... 복날에 인간에게 복수라도 하듯 따가운 햇볕이 마구 내리쬔다. NASA에 의하면 올해가 역사상 가장 더운 여름이란다. 전 세계 평균기온의 상승으로 재작년보다 작년이, 작년보다 금년이 더 더웠단다. 일시적인 엘니뇨 탓이길 바랄 뿐이다. dog 얘기 하다가 dogma(독단)에 빠질라. 이쯤 해서 dog설(毒舌)을 마친다. 개 박살 날라.
2016.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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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그리기

개  
2016.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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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해인 9월호 원고

성엄법사(聖嚴法師, 1930~2009) 게송(偈頌)   대만은 지진과 태풍 등의 천재지변이 많은 나라다. 그런데도 세계 어느 곳이든 재난이 발생하면 앞서 달려가는 단체 중의 하나가 대만 불교자원봉사단이다. 대만도 우리와 같이 대승불교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무엇보다 불교의 현대화와 생활화에 앞장서고 있으며, 특히 교육 불사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이러한 바탕에는 법고산(法鼓山) 성엄법사(聖嚴法師, Sheng-Yen, 1930~2009)의 공이 매우 크다. 성엄법사는 일본에 유학하여 석·박사학위를 받고, 미국에 건너가 포교 활동을 하기도 했다. 대만에 돌아온 뒤로는 법사를 따르는 신도들이 끊임없이 늘어났다. 이에 8년 동안 불사를 크게 펼쳐, 1989년 3월 금산(金山)에 ‘법고산세계불교교육원구(法鼓山世界佛教教育園區)’라는 대찰(大刹)을 완공하기에 이른다. 다음은 성엄법사가 설법하던 중에 불자와 함께 즐겨 낭송했던 게송이다.   留得青山在 (유득청산재) 푸른 산 남겨 두었으니不怕没柴燒 (불파몰시소) 땔나무 걱정은 없으리. 我還有呼吸 (아환유호흡) 내게 아직 호흡 있으니當然滿足了 (당연만족료) 당연히 만족하고말고.   모든 걱정은 스스로 만든 비교의 마음에서 일어난다. 이를테면 ‘부자면 좋고 가난하면 나쁘다’라고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면 세상에는 갈등과 싸움만 남는다. ‘부자라도 좋고, 가난해도 좋다’라는 절대적 인식을 가질 때 행복하게 살 수 있다. ‘많아도 좋고, 적어도 좋고, 없어도 좋다’라는 마음의 깊이를 가질 때 진정한 평화와 행복을 누릴 수 있다. 리우 올림픽. 이겨도 좋고, 져도 좋고, 출전하지 못해도 좋다. 내 곁에는 푸른 산이 있고, 땔나무가 있으니 무슨 걱정인가.마음의 평화를 얻으려면 호흡에 집중해야 한다. 살아가면서 폭풍우와 같은 어려움을 만날 때도 있다. 이런 때일수록 더욱 경건하게 호흡해야 한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이다. 호흡한다는 것은 가장 중요한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는 증거다. 그렇다면 그토록 중요한 호흡을 하고 있는데 만족하지 못할 게 무엇인가.생활 속의 보리 곧, 평범 속의 특별한 깨달음이 중요하다.   수월 권상호    
2016.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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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의 갈라 쇼, 일품(逸品) 묵향

세계일보 문화기획- 문자로 보는 세상 18붓의 갈라 쇼, 일품(逸品) 묵향- 붓 길에 마음 얹고 먹빛으로 힐링하다 -   인간의 발명품 중 으뜸은 ‘글’이라 생각한다. ‘말’도 소중한 발명품이긴 하지만 휘발성이 강하여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린다. 하지만 글은 모양이 쉬이 변하지 않는데다가 영속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인류의 역사와 문화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그러고 보니 글을 써온 ‘붓의 사명’은 절대적이었다.말이 꽃이라면 글은 열매이다. 말을 잘한다는 것은 말 속에 꽃과 같은 아름다움과 향기가 스며있다는 뜻이다.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까지 많은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듯이 말을 잘하기 위해서도 긴 세월과 노력이 요구된다. 꽃의 마지막 임무라면 나름의 향기와 빛깔로 벌 나비를 유혹하여 열매를 맺는 일이다. 열매는 대개 그 속에 씨앗을 숨기고 있다. 마찬가지로 말의 마지막 임무는 문방사우를 유혹하여 글씨로 남는 일이다. 꽃이라고 다 씨앗이 되지 않듯 말이라고 다 글씨로 남는 건 아니다. 말 중에 귀한 말을 글씨로 남기는 일을 우리는 서예라 한다. 달리 말하면 ‘서예란 말로 피운 꽃을 글씨란 씨앗으로 남기는 일’이다. 말의 열매 속에는 글이란 씨앗이 들어있다. 그래서 ‘글’에 ‘씨’ 자를 붙여 ‘글씨’라 하는 것이다. 글씨도 씨앗처럼 얼핏 보기엔 죽은 듯하나 그 속에 생명을 잉태하고 있다. 꽃 피고 열매 맺고 그 속에 씨앗마저 영글기까지는 바람과 물과 햇살 등이 필요하듯, 글씨도 예술작품으로 남기까지는 작가의 많은 땀과 생각과 필(feel, 筆) 등이 요구된다.여기 평생 붓을 잡고 살아온 선비들이 ‘한국서예일품전(韓國書藝逸品展)’이란 이름으로 먹빛잔치를 펼친다. 8월 18일(목)부터 24일(수)까지 한 주간 서예 명가, 인사동 백악미술관에서 펼치는 이번 전시는 일품이란 제목이 말해주듯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작가 35명의 야심작으로만 전시된다. 그야말로 ‘동방일사(東方逸士)의 일품묵향(逸品墨香)’이다.일품 작가들은 오랜 세월 혼자만의 시간 갖기에 익숙함을 넘어, 고독을 즐길 줄 아는 서예가로서 자부가 대단하다. 적어도 무지개를 보기 위해 소나기를 견디고, 설중매를 보기 위해 눈서리를 겪어온 분들이다.개인에게는 인격이 있고 나라에는 국격이 있듯이 예술 작품에는 품격(品格)이 있다. 작품은 기록경기와 달리 등수를 매길 수는 없지만, 품격이란 이름으로 작품의 성격에 대한 논의는 가능하다. 필자는 조심스럽게 아홉 가지의 품격으로 나누어 보기로 한다.보고 이해할 만한 정도의 범품(凡品), 필법에 따라 운필한 법품(法品), 차별화된 능력을 인정받는 능품(能品), 정교한 기예로 감동을 주는 예품(藝品), 운치가 넘쳐흘러 오묘한 묘품(妙品), 학술적 깊이와 관조적 정서가 비할 데 없는 절품(絶品),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달인의 도품(道品), 붓끝에 신운이 감돌아 손에서 나왔으나 인간의 경계를 넘어선 듯한 신품(神品), 일체의 세속을 벗어나 더할 수 없는 높은 경계에 이르러 생각의 깊이와 느낌의 넓이와 상상의 높이를 잴 수 없는 일품(逸品). 이 중에 일품은 작가의 손을 떠나 있으면서도 영원히 작가의 영혼을 비춰주므로 아우라(aura)가 느껴지는 작품이다.돌이켜 보면 역사시대 이래 지금까지 서예는 권력의 구심점에 있었다. 문자를 터득하고 붓을 잡는다는 것은 곧, 권력을 잡는 일이었다. 이를 일러 ‘문자권력’이라 한다. 서예 용구를 일러 문방사보(文房四寶)라 하는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문자는 발명 이래 양반이나 귀족과 같은 특정 계층만을 위한 것으로서, 요즈음처럼 아무나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갑골문(甲骨文)은 제사와 수렵을 총괄하는 제왕의 문자권력이었다. 소전(小篆)은 진시황의 권력이었고, 파스파 문자는 원 세조 쿠빌라이 칸의 권력이었다. 청 태조 누르하치도 몽골문자를 개량한 만주문자를 만들어 문자권력을 휘둘렀다.우리의 경우 이두(吏讀)는 ‘벼슬아치 리(吏)’ 자가 말해주듯 벼슬아치들의 권력이었고, 고려 광종 때(958)부터 갑오개혁 때(1894)까지는 한문이 절대적 권력이었다.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최만리의 반대 상소는 한문 문자권력의 누수를 염려하여 나온 행위라고 볼 수 있다.옛날의 간찰은 한결같이 초서로 쓰여 하인은 눈뜨고 봐도 알 수 없었다. 초서는 작가의 성정을 마음껏 풀어주는 서예술의 꽃이기도 하지만 문자권력자들 간의 비표(秘標)이기도 했다. 요즘도 법률·의학·행정 등의 전문용어를 쉽게 고쳐 쓰자는 여론이 일어나곤 하지만 정책 입안자들은 절대 곧이듣지 않는다. 그 이유는 기득권자들이 이미 문자권력에 맛을 들였기 때문이다. 약방문을 환자가 이해하면 약효가 떨어지고, 부적을 남이 읽어내면 영험함이 사라진다고 믿었다. 그런데 이제 세상은 달라졌다. 빅 데이터와 소통이 대세인 SNS 세상으로 급격하게 바뀌자 인공지능(AI)이 인간의 지력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슬로우 아트인 서예의 입지가 약화하는 건 당연하다. 초서로 아무리 빨리 쓰더라도 엄지족이 쏟아내는 정보의 양을 절대 따라잡을 수 없다. 문자의 자리를 사진이 차지하더니 이제는 동영상이 지키고 있다. 독서도 활자가 아닌 영상 매체로 하거나, 더러는 며칠간 읽어야 할 소설을 한 편의 영화로 대신하는 세상이 되었다.그렇다. 이제 실용적 소통의 도구로서 서예에 접근한다면 무리다. 예술적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 이른바 캘리그래피(calligraphy)가 서예의 실용성을 어느 정도 대신한다고 하지만 역부족이다. 이쯤 하여 서예의 실용성은 아예 컴퓨터 폰트한테 완전히 넘겨주는 게 좋을 듯하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서(書)’에 ‘예(藝)’ 자를 붙인 우리의 ‘서예(書藝)’라는 단어 선택은 중국의 ‘서법(書法)’이나 일본의 ‘서도(書道)’에 비해 탁월한 판단이자, 미래지향적 선택이었다.이번의 일품전은 예술적인 측면에서 보면 황홀한 ‘붓의 갈라 쇼(gala show)’라 할 수 있다. 붓으로 지휘하고 먹으로 연주한 ‘일품(逸品) 오케스트라’의 묵향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욕심 같아선 전시 내내 일정한 시간대에 ‘라이브 서예 갈라 쇼’를 직접 보여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번 전시는 ‘순수예술로서의 서예선언’을 하는 역사적 이벤트로 자리매김하길 바란다. ‘신서예운동’이랄까. 이것이 서예의 새 활로이며 문자권력 대신에 문화권력으로서의 서예의 새 지평을 여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얼마나 운이 좋은가. 올해도 무더위에 밤잠을 설치고 모기에 물리다니... 생명이 있는 한 붓끝으로 불을 뿜다가 새로 산 옷에 먹물이 튀기를 바랄 뿐이다. 아인슈타인의 격언 중에 “메아리가 되지 말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라.”라는 말이 있다. 물리학자의 말이지만 예술가에게도 딱 들어맞는 말이다. 남이 하는 대로 따라하지 말고 자기 주관대로 하라는 것이다. 금세 죽더라도 예술가의 생명줄은 창조이다. 예술가들이 고귀하게 여기는 창조는 다름 아닌 개성에서 나온다. 지구 위의 모든 사람은 목소리가 서로 다르다. 내 목소리는 틀린 게 아니라 ‘다름’이다. 다름이란 예술가에게 있어서는 절대 자존의 나만의 세계 곧, ‘개성(個性)’인 것이다. 세상의 작업은 ‘같이(together)’가 ‘가치(value)’지만, 예술 작업은 ‘달리(different)’가 달러(dollar)다.      
2016.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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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의 언덕(현판)

양평에서 현판 부탁이 있어서 두 가지 서체로 써 보았다. 
2016.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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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刊 2016. 8월호 '소림사'

月刊 2016. 8월호 '소림사' ​ 
2016.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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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순국 '순국 gallery' - 광복 71주년 기념 휘호

월간 초청 '순국 gallery' 광복 71주년 기념 휘호​光復 完成 (광복 완성)祖國 統一 (조국 통일)- ​광복은 71년 전에 쟁취했지만, 사실 기쁨은 잠시뿐 완전한 광복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완전한 행복은 무엇일까? 조국의 통일이라 생각한다. 그때의 국호는 우리나라가 '코리아'로 불리니까 '고려'도 좋고... 물론 대한민국은 더 좋지만...​한글로 쓴 내용은 보이다시피'광복의 기쁨이 통일의 대박으로'이다​​
2016.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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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문화기획- 문자로 보는 세상 17 - 생각의 근육

세계일보 문화기획- 문자로 보는 세상 17생각의 근육아무 생각 없이 한없이 게을러지고 싶은 여름이다. 후터분한 날씨에는 생각하는 것 자체가 만사가 귀찮고 짜증이 나는 일이다. 그런데도 살아있기에 생각해야 하고, 생각해야만 올바른 언행을 낳을 수 있다. 한순간 생각을 놓음으로 말미암아 금주에도 끔찍한 교통사고가 발생하고, 현직 부장판사가 성매매 현장에서 적발되는 일이 발생했다.‘생각(thought)’이라는 말은 순우리말임에도 더러는 한자어에서 온 줄 알고 ‘生覺’으로 잘못 쓰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우리 선조들의 문집에는 물론 왕조실록에조차도 ‘生覺’이란 한자어를 사용한 예가 없다. 중국어나 일본어 사전에도 이 단어는 없다. 이는 ‘선생(先生)님’을 ‘先生任(임)’으로 잘못 쓴 것처럼, 의미와 상관없이 비슷한 음만 취하여 한자로 옮겨 쓴 ‘취음자(取音字)’일 뿐이다. ‘생각나다’에 ‘-나다’라는 접사가 붙어있는 걸 보면 ‘날 생(生)’ 자를 쓸 수 없음이 분명하다. ‘없던 것이 새로 있게 되다’라는 뜻의 동사 ‘생기다’도 ‘생(生)’과는 무관하다.그런데 영조 때의 몽골어 학습서인 에는 ‘제 生覺’, 김천택의 시조에는 ‘님 生覺’과 같은 예가 보이는 것은 조선 후기에 오면서부터 ‘生覺’이란 한자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근거가 된다. 특히 일제 강점기로부터 1950년대까지의 각종 신문과 잡지에는 한자를 좋아하는 호사가들에 의해 ‘生覺’으로 표기한 예가 많이 나온다.고어에서는 ‘생각’을 ‘ᄉᆡᆼ각’으로 표기했다. 한자어 ‘생사(生死)’도 ‘ᄉᆡᆼᄉᆞ’로 표기하듯이 고전 에서는 ‘생’ 자는 사용하지 않았다. ‘생각’과 같은 뜻으로 ‘ᄉᆞ랑’이란 단어가 있었는데, 이 말은 ‘생각’이란 의미 외에 ‘사랑(愛)’의 의미도 포함하고 있었다. 하기야 생각 없는 사랑 없고, 사랑하면 서로를 생각하게 되겠지만, 한자 애호가들은 ‘사랑’도 ‘사량(思量)’에서 온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도대체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생각’이란 무엇인가. 생각이란 ‘말이나 글로 표현되기 전의 정신작용’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생각이란 우리의 판단이나 인식, 혹은 기억이나 느낌 등을 말이나 글로 표현하기 이전에, 머릿속에 남아있는 ‘추상적 언어’를 뜻한다. 우리는 생각에 의존하며 삶을 영위하고 생각이 낳는 언어로써 대화하며 살아가고 있다. 알고 보면 우리의 언어와 행동은 생각의 자식에 불과하다. 또한, 지식이란 생각의 축적이고, 축적된 생각을 이용해 인류는 새로운 지식의 장을 열어가고 있다.누구나 ‘생각’이라 하면 떠오르는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1596-1650)의 명언이 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Cogito, ergo sum.)” 이 라틴어 명제는 방법적 회의 끝에 도달한 철학의 출발점이 되고 있다. 그는 또 “우리가 의심하고 있는 동안 우리는 (의심하고 있는) 자신의 존재를 의심할 수 없다.”라고 했다.역시 프랑스 철학자인 파스칼(1623~1662)도 ‘생각’에 대한 명언을 남기고 있다. “인간은 하나의 갈대에 지나지 않는, 자연에서 가장 연약한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Man is but a reed, the most feeble thing in nature, but he is a thinking reed.)” 파스칼은 에서 인간의 존엄성은 생각에 있으므로, 생각으로 자신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잘 생각하기’에 힘쓸 것이니, 이것이 바로 ‘도덕의 근본’이라 했다. 인간을 가리키는 학명의 하나로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가 있다. 흔히 인간에게 이성(理性)과 지성(知性)이 있다고 하는 것은 호모 사피엔스를 근거로 한다. 철학에서 이성이란 사물의 이치를 논리적으로 생각하여 진위와 선악을 바르게 판단하는 능력을 말하고, 지성이란 지각된 것을 정리하고 통일하여 새로운 인식을 낳게 하는 정신 작용을 일컫는다.우리는 살아가면서 이성적, 합리적 사고만이 아니라 감성적, 경험적 사고를 포함한 다양한 생각을 하면서 철학자가 되어 간다. 평범한 일상에서 특별한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심도 있는 ‘생각의 과정’이 필요하다. 때로는 많은 경험에서 오는 직관의 눈이 요구되기도 한다.동양의 ‘생각의 뿌리’는 ‘사무사(思無邪)’에서 출발한다. 사무사는 공자가 을 산정한 후에 고백한 말로 ‘생각이 발라서 사악함이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런지 일상에서 스마트폰으로 주고받는 문자 중에는 ‘좋은 생각’, ‘깊은 생각’에서 우려낸 사무사의 글들이 많다.그리고 공생(共生)의 철학으로는 ‘역지사지(易地思之)’가 있다. 이 말은 이루편(離婁編)의 ‘역지즉개연(易地則皆然, 처지가 바뀌었다면 모두가 그러했을 것)’이라는 표현에서 비롯된 말로서, ‘아전인수(我田引水)’와는 대립하는 의미이다.세상은 바뀌었다. 이른바 ‘빅 데이터 시대, AI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자칫 자신을 잃기 쉽다. ‘내 생각’은 줄어들고, ‘남의 생각’의 조합으로 살아가는 세상이다. 이러한 때일수록 우리는 ‘생각의 근육’을 길러야 한다.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버킷리스트(bucket list)를 정해 놓고 행동으로 옮기도록 하자. 흔히 “생각은 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라고 한다. 알고 보면 이때의 생각은, 생각이 아니라 군걱정에 지나지 않는다. 실천이 따를 때 ‘진정한 생각’이라 할 수 있다. 생각도 생명체와 같아서 이의 건강을 위해서는 생각의 근육을 기를 필요가 있다. 첫째, 매일 아침 ‘생각의 새순’을 싹틔우자. 밤잠은 매일 죽는 연습이라 했다. 그렇다면 아침의 기상은 환생이라 할 수 있다. 잠보다 더 귀한 ‘생각 보약’은 없다. 잠자는 동안 모든 잡념일랑 일체 지워버리고, 새벽 시간 조용히 산책하면서 혼자만의 고독을 즐기자. 그러면 생각의 새순이 우후죽순처럼 돋아나고, 그 옆에는 생각의 맑은 샘물이 넘쳐흐르리라.둘째, ‘생각의 날개’를 달자. 이는 균형 잡힌 생각을 하라는 뜻이다. 하나의 날개로는 하늘을 날 수 없듯이 하나의 생각만으로는 급변하는 세상에 적응할 수 없다. 한 생각이 한 곬으로 잘못 치우치면 고집불통이 된다. 생각이 균형 감각을 유지할 때, 아집에서 오는 악념(惡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셋째, 생각이 춤추게 하자. 생각이 춤을 추어야 경계를 넘을 수 있다. 이는 기존 생각의 틀을 깨지 않고서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올 수 없다는 뜻이다. 가끔은 주제넘은 생각을 해야 한다. 주제넘은 생각에서 창의적인 발상이 떠오른다.마지막으로 생각도 쉬게 하자. 삶을 리셋하기 위해서는 생각에도 휴식이 필요하다. 독서가 생각에 영양분을 공급하는 일이라면, 휴식은 생각에 산소를 공급하는 일이다. 우리 민족은 생각이 깊은 민족이다. 국보 제78호, 제83호, 제118호가 모두 오묘한 생각에 젖어 있은 ‘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이란 것만 보아도 사유(思惟)를 사랑하는 민족임을 알 수 있다.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의 모습은 깨달음을 얻기 위한 자세로 한 손을 가볍게 턱밑에 고인 평화로운 모습이지만, 프랑스 조각가 로댕(1840~1917)의 ‘생각하는 사람’은 오른 팔꿈치를 왼쪽 무릎 위에 올려놓은 매우 불편한 자세이다. 생각이란 수용적 평화인가, 선택적 고통인가.
2016.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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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준비(주제: 미적 삶과 예술)

                                                                                       사진: 창작 오페라 . 국립극장에서 주제: 인간의 미적 삶과 예술분량: A4 용지 10point 13쪽발표:  - 길림대 총문준 교수, 절강대 진진념 교수등  참여 예정 
2016.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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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1주년 기념 휘호

국가보훈처 에서 광복 71주년 기념 휘호 두 작품을 부탁해 왔다.​진정한 광복은 무엇일까?조국의 통일이라 생각한다.​그래서 생각해 본 것이​-광복의 기쁨은, 통일 대박으로​​- 광복완성 조국통일(光復完成 祖國統一)​​- 진정한​ 광복, 조국의 통일​- 광복의 기쁨​, 통일의 그날까지​​- 간절한 소망 하나, 통일된 대한민국(실은 통일이 된다면, 국호는 고려(Korea), 대고려 등... 열린 생각으로 접근해 봐야 한다.)​- 불볕더위 날려줄, 통일의 대박바람
2016.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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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일사(東方逸士)의 일품묵향(逸品墨香)

동방일사(東方逸士)의 일품묵향(逸品墨香)권상호(문학박사, 칼럼니스트)1. 일품(逸品), 나를 말하다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서예 일사(逸士)들이 모여, 표일(飄逸)하고 청일(淸逸)한 일품(逸品)으로 일품향(逸品香)인 묵향(墨香)을 담아, 서예 명가인 백악미술관에서 먹빛을 펼치니 이른바 한국서예일품전(韓國書藝逸品展)이다. 일품 작가들은 오랜 세월 혼자만의 시간 갖기에 익숙함을 넘어, 고독을 즐길 줄 아는 향적불고(享寂不孤)의 서가(書家)로서 자긍(自矜)이 대단하다. 적어도 무지개를 보기 위해 비바람을 참고, 설중매를 보기 위해 눈서리를 견뎌 온 분들이다. 일품(逸品)은 일품(一品)으로 붓 멋과 먹 맛의 경계를 벗어나 있다. 범품(凡品), 법품(法品), 능품(能品), 예품(藝品), 묘품(妙品), 절품(絶品), 도품(道品), 신품(神品) 등의 서예계(書藝系) 행성(行星)을 두루 섭렵한 뒤에 궤도 밖에서 놀고 있는 별이다.누구나 보고 읽을 수 있을 정도의 평범한 범품(凡品), 교통법에 따라 운전하듯 필법에 따라 운필한 법품(法品),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차별화된 능력을 인정받는 능품(能品), 정교한 필묵 연주의 기예에 감동하게 되는 예품(藝品), 획법·자법·장법이 치밀하면서도 운치가 넘쳐흐르고 오묘한 묘품(妙品), 학술적 깊이와 관조적 정서가 비할 데 없는 절품(絶品), 오랜 수련으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달인의 도품(道品), 붓끝에서는 신운이 감돌고 내용마저 신비로워 인간의 손에서 나왔으나 인간의 경계를 넘어서 신의 도움을 받은 듯한 신품(神品), 일체의 세속을 벗어나 더할 수 없는 높은 경계에 이르러 생각의 깊이와 느낌의 넓이와 상상의 높이를 알 수 없는 일품(逸品). 일품은 작가의 손을 떠나 있으면서도 영원히 ‘작가를 대변’하고 있기 때문에 아우라(aura)가 느껴진다.개인에게는 인격(人格)이 있고 나라에는 국격(國格)이 있듯이 예술 작품에는 품격(品格)이 있다. 필자는 조심스럽게 경복궁 근정전(勤政殿) 앞뜰에 놓인 품계석(品階石)처럼 구품(九品)으로 구분해 보았지만, 서열을 매길 생각은 전혀 없다. 작품은 기록경기와 달리, 순서를 매길 수도 없고 매겨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설령 등수를 매긴다 하더라도 미적 잣대에 따라 순위가 달라진다. 하지만 품격(品格)이란 이름으로 작품의 성격에 대한 논의를 하는 것은 지금까지도 많이 있어왔고 앞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2. 서예(書藝), 문자권력을 말하다 인간의 발명품 중 최고 작품은 아마 ‘글’일 것이다. ‘말’도 중요하지만 휘발성이 강하여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하지만 글은 불변성(不變性)·영속성(永續性)의 특성과 함께 인류문화(人類文化)와 역사(歷史)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그러고 보니 붓의 사명(使命)은 대단하면서도 절대적이다. 돌이켜 보면 역사시대(歷史時代) 이래 지금까지 문자(文字)는 권력의 구심점에 있었다. 문자를 터득하고 붓을 잡는다는 것은 권력을 잡는 일이었다. 이를 일러 ‘문자권력(文字權力, 이후 文權)’이라 할 수 있다. 서사 도구를 문방사보(文房四寶)라 하는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문자는 발명 이래 양반이나 귀족과 같은 특정 계층만을 위한 것으로서 아무나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갑골문(甲骨文)은 제사와 수렵을 맡은 제왕의 문권(文權)이었다. 소전(小篆)은 진시황의 문권이었고, 파스파 문자는 원 세조 쿠빌라이 칸의 문권이었다. 청 태조 누르하치도 몽골문자를 개량한 만주문자를 만들어 문권을 휘둘렀다.우리의 경우도 이두(吏讀)는 ‘이(吏)’ 자가 일러주듯 벼슬아치들의 문권이었고, 고려 광종 때(958년)부터 갑오개혁 때(1894년)까지는 한문이 절대적 권력이었다. 물론 이때는 문자라 하면 으레 한문을 가리켰다. 세종의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에 대한 최만리의 반대 상소는 문자권력 누수(漏水)를 염려하여 나온 행위였다. 옛날의 간찰(簡札)은 한결같이 초서(草書)로 쓰여져 하인은 봐도 알 수 없었다. 초서는 작가의 성정(性情)을 마음껏 풀어주는 서예술의 꽃이기도 하지만 문자권력 그룹의 비표(祕標)이기도 했다. 요즘도 한글날을 즈음하여 법률·의학·행정 등의 전문용어를 쉽게 고쳐 쓰자는 여론이 일어나지만 결코 곧이듣지 않는다. 이유는 기득권자가 이미 문권에 맛을 들였기 때문이다. 아예 약방문(藥方文)을 환자가 이해하면 약효가 떨어지고, 부적(符籍)을 남이 읽어내면 영험함이 사라진다고 믿고 있다. 그런데 세상은 달라졌다. 소통(疏通)과 빅 데이터(big data)가 대세인 세상으로 급격하게 바뀌고, 인공지능(人工知能, AI)은 인간의 능력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슬로우 아트인 서예의 입지가 약화되는 건 당연하다. 초서로 아무리 빨리 쓰더라도 엄지족이 쏟아내는 정보의 양을 절대 따라잡을 수 없다. 그렇다. 서예는 이제 실용적(實用的) 소통의 문제로 접근해서는 곤란하다. 예술적(藝術的)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 이런 면에서 보면 ‘서(書)’에 ‘예(藝)’ 자를 붙인 우리의 ‘서예(書藝)’라는 단어 선택은 중국의 ‘서법(書法)’이나 일본의 ‘서도(書道)’에 비해 탁월한 판단이자, 미래지향적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다.예술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번의 일품전은 황홀한 ‘붓의 갈라 쇼(gala show)’라 할 수 있다. 붓으로 지휘하고 먹으로 연주한 ‘일품(逸品) 오케스트라’는 매우 성공적인 클래식 연주에 비견할 수 있다. 소위 캘리그래피(calligraphy)가 서예의 실용성을 어느 정도 지키고 있기는 하지만, 차제에 실용성은 컴퓨터 폰트에게 완전히 넘겨주자. 그리고 이번 전시는 ‘순수예술(純粹藝術)로서의 서예선언(書藝宣言)’을 하는 역사적 이벤트로 기록되길 바란다. ‘신서예주의(新書藝主義)’랄까. 이것이 서예의 새 활로이며 새로이 문자권력을 획득하는 길이다.  3. 개성(個性), 자존(自尊)을 말하다“Be a voice not an echo.”독일 태생의 미국 물리학자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이 남긴 격언(格言)이다. ‘메아리가 되지 말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라’는 정도의 뜻이 되겠다. 남이 하는 대로 따라하지 말고 자기 주관(主觀)대로 실천하라는 말이다. 이론 물리학자의 말이지만 창조(創造)를 생명처럼 여기는 예술가에게도 딱 들어맞는 말이다. 목소리는 지구 위의 모든 사람이 서로 다르다. 내 목소리는 틀린 게 아니라 ‘다름’이다. 다름이란 예술가에게 있어 절대 자존(自尊)의 ‘나만의 세계’ 곧, ‘개성(個性)’인 것이다.한 외국 작가가 한국의 서예공모전을 보고 ‘개인전인 줄 알았다’고 말한 웃어넘길 수 없는 일이 있었다. 한마디로 ‘몰개성(沒個性)의 전시’였다는 말이다.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하는 큰 울림으로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래, 앞으로 한국 서예계는 모든 붓쟁이를 ‘법노(法奴)’로 묶어 두어서는 안 된다. 서예를 즐기는 ‘낙서가(樂書家)’로 키워야 한다. 그래야 서예 김연아도 나오고, 서예 박지성도 나올 수 있다.학원에 다니지 않아도 자전거를 탈 줄 알고, 한두 달이면 자동차 면허증도 딸 수 있다. 운필(運筆) 라이선스(license)도 서너 달 골똘히 수련하면 취득할 수 있도록 지도해야 한다. 왕희지(王羲之)나 김정희(金正喜)가 스승의 서슬 아래 법노로 묶여 있었다면 결코 명필(名筆)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객관적 악필(惡筆)도 주관적 명필(名筆)일 수 있다. 이러한 ‘프라이드(pride) 서예정신’에서 뜻밖의 새로운 작품이 창출된다. 안진경(顏眞卿)만 죽도록 따라 쓰다가는 안진경 아류(亞流)밖에 될 수 없고, 스승의 체본(體本)만 열심히 베끼다 보면 결코 스승을 능가할 수 없다. ‘Be a voice’는 한국 서단에 경종을 울리는 격언으로 들린다. 나름의 붓 연주로 자신만의 개성 있는 목소리를 낼 수 있을 때, 진정한 아티스트로 거듭날 수 있다. 작가는 외적으로 겸손하더라도 내적으로는 무한한 자존감(自尊感)이 필요하다. 석가모니가 아니더라도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을 부르짖을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잘 났다”라고 자부하는, 오만하고 독선적인 일품 작가로 남기를 기도한다.   
2016.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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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구름이 비 될지 모른다

​세계일보 문화기획- 문자로 보는 세상 16어느 구름이 비 될지 모른다- 날씨와 기후(氣候) 이야기 -한반도는 푹푹 찌고 있다. 수도권에서는 불볕더위 속에 후텁지근한 열대야가 계속되어 ‘잠 못 드는 밤’이 이어졌다. 내주에는 기록적인 무더위가 한반도를 덮치고, 9월 중순까지 더운 날씨가 이어진다는 소식이다. 하지만 지구촌 전체가 살인적인 더위 속에 허덕이고 있으니 우리라고 예외일 수는 없을 것이다. 중국, 이라크, 미국, 영국 등 북반구의 여러 나라는 역사상 최고 더운 여름을 힘겹게 보내고 있다. 중국의 수해와 인도의 가뭄, 미국의 산불 등은 대재앙 수준이다. 미 항공우주국(NASA)에서 “2016년은 엘니뇨와 온실가스 등의 산업 활동에 따른 영향으로 기상관측 이래 가장 더운 해가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지식정보화사회에서 인공지능과 함께 살아가면서도 날씨는 여전히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정보로 존재한다. 기상청에서는 여전히 TV나 라디오 등의 매체를 통하여 뉴스가 끝난 뒤에 좀 더 정확한 내일 날씨를 예보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누구나 스마트폰에 날씨 앱을 깔고 다니면서 전 세계의 지역 날씨까지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모든 생물은 순간순간의 날씨를 피부로 느끼며 이에 대비하거나 반응하면서 살아간다. 직업에 따라서는 날씨가 생업을 좌우하기도 하며 더러는 날씨가 피할 수 없는 재난을 동반하기도 한다. 결론은 날씨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다.‘날씨’는 일정한 지역에서 그날그날의 대기 상태를 말한다. ‘날씨’에서 ‘날’의 근원적인 뜻은 ‘날 일(日)’이라 할 때의 ‘날’처럼 ‘해’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본다. ‘날이 덥다’라고 할 때의 ‘날’은 ‘날씨’를 가리킨다. 그런데 같은 ‘날’이라도 ‘오늘은 기분 좋은 날’이라고 할 때의 ‘날’은 자정에서 다음 자정까지로 24시간이지만, ‘날이 저물다’라고 할 때의 ‘날’은 ‘하루 중 환한 동안’만을 가리키므로 날의 기간이 절반 정도로 줄어든다. ‘아침나절, 반나절’에서 ‘나절’은 하룻낮의 절반쯤 되는 동안을 뜻하므로 ‘날’의 절반이다. ‘날’에 ‘-씨’가 붙어서 날씨가 되는데, 이때의 ‘-씨’는 ‘말씨, 글씨, 솜씨, 마음씨’ 등에 붙어있는 ‘-씨’와 같은 의미로 본다. 여기의 ‘-씨’는 ‘태도’ 또는 ‘모양’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이다.한편 명사 ‘씨’의 일차적인 뜻은 식물의 씨앗이나 종자(種子, seed)를 뜻한다. ‘개량종의 씨’라고 할 때의 ‘씨’는 동식물에 다 해당하고, ‘씨가 다른 형제’라고 할 때의 ‘씨’는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말이다. 남의 이름 밑에 띄어 쓰는 ‘씨(氏)’는 높임의 뜻이고, ‘경주 김씨, 이씨, 박씨’라고 할 때의 ‘-씨’는 같은 성을 가진 씨족을 나타내는 접미사이다. 대추씨를 심으면 열매 속에는 대추씨만 맺히듯이, 여성의 성씨와는 관계없이 ‘김씨’인 남성과 결혼을 하여 낳은 자식은 아들이든 딸이든 모두 ‘김씨’가 된다. 따라서 ‘혼인할 혼(婚)’은 ‘여자가 씨를 받는 날’로 풀이된다. 또 ‘씨’를 받아들이는 여성의 성기 또는 성교를 속되게 표현하는 말도 다 ‘씨입(氏入)’의 준말인 그것이다. 지난날, 혼인한 부부의 아내에게 이상이 있어 대(代)를 잇지 못할 경우에 재물을 받고 그 남자의 아이를 대신 낳아 주던 여자를 일러 ‘씨받이[代理母]’라 하고, 남편에게 이상이 있어 남편 대신에 합방하여 아이를 배게 하던 남자를 ‘씨내리[代理夫]’라고 했다.‘날씨’와 같은 뜻으로 쓰이는 한자어에 ‘일기(日氣)’, ‘천기(天氣)’, ‘기상(氣象)’ 등이 있다. 여기에 공통으로 나타나는 글자는 ‘기운 기(氣)’이다. ‘기운’이란 말은 ‘기운이 세다’에서 보듯이 한자어처럼 느껴지지만 순우리말이다. 그리고 ‘무더운 기운’에서 보듯이, 기운이란 느낄 수는 있으나 눈으로 볼 수는 없다. 그래서 하루의 기운인, 일기(日氣)를 예보하는 일이 그만큼 어려운가 보다. 잘 맞혀야 본전이고 틀리면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는 곳이 기상청(氣象廳)이다. 이처럼 소중한 일을 하는 곳이므로 전에 관상대(觀象臺)라고 하던 명칭을 기상청으로 높여 부르게 되지 않았을까. ‘날씨’와 비슷한 말이지만, ‘온대기후(溫帶氣候)’에서처럼 어느 특정 지역의 평균적인 기상 상태를 일컫는 말로 ‘기후(氣候)’가 있다. 기후는 본래 1년의 24기(氣)와 72후(候)를 줄여서 하는 말이었다. 또 기(氣)는 절기(節氣)로, 후(候)는 절후(節候)라 부르기도 했다. 그러니까 옛날에는 15일간의 날씨를 절기라 하고 5일간의 날씨를 절후라 했는데, 이 중 절기만은 오늘날에도 달력에 표시하고 있다. 그런데 달(moon)을 중심으로 만든 음력은 농사철과 맞지 않기 때문에 농사가 주업이던 선조들은 해(sun) 중심의 24절기 명칭을 기본적으로 외우고 살았다. 절기를 순우리말로 ‘철’이라 한다. 절기를 모르면 ‘철부지’였고, 절기를 알면 ‘철든 이’였다. 농업 교과서나 다름없는 는 농가에서 연간 해야 할 일을 월령체 형식으로 적고 있는데, 월(月)마다 두 절기 이름이 앞에 나온다. 이 대목에서 귀농(歸農) 붐도 조금씩 일어나고 있는 이때, 지금에 해당하는 음력 6월령 앞부분만이나마 음미해 보고자 한다.유월이라 계하(季夏, 늦여름) 되니소서(小暑), 대서(大暑) 절기(節氣)로다.대우(大雨)도 시행하고(때로 오고)더위도 극심(極甚)하다.초목(草木)이 무성(茂盛)하니파리, 모기 모여들고평지(平地)에 물 고이니악마구리(참개구리) 소리로다.봄보리, 밀, 귀리를 차례로 베어내고...소서, 대서 절기 중의 삼복(三伏)가 한창인 때는 큰비가 내리고, 파리와 모기가 많았다는 점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여기에서 치매 예방을 위한 연월일시(年月日時) 공부 좀 해 볼까. ‘1년(年)은 4계절(季節)이요, 계절에는 3개월(個月)이 들어있다. 한 달에는 두 절기(節氣)가 있고, 한 절기에는 세 후(候)가 있다. 따라서 1후는 5일(日)이요, 1일은 12시(時)로다.봉건 시대에 영토를 가지고 그 영내의 백성을 지배하던 사람을 제후(諸侯)라 했는데, 제후는 주몽처럼 기본적으로 활을 잘 쏘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제후 후(侯)’에서 온 ‘물을 후(候)’ 자는 기본적으로 ‘묻다, 시중들다, 기다리다’ 등의 뜻이 있다. 의미상 이질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상관관계가 깊다. 이를테면, 제후(諸侯)는 황제를 자주 방문하여 안부를 묻는 문후(問候)를 잘해야 하고, 어떤 자리에 결원이 생길 것을 대비하여 후보(候補)처럼 때를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하며, 철새 곧 후조(候鳥)가 날아가는 것을 보고 시후(時候)나 절후(節候)를 살필 줄도 알아야 한다.집안 어른께 편지 올릴 때, 상투적으로 쓰는 문구가 있었다. ‘기체후(氣體候) 일향만강(一向萬康)하온지요’여기서 후(候)는 ‘상태’, 일향(一向)은 ‘한결같이’, 만강(萬康)은 ‘매우 평안함’을 뜻하니, ‘정신과 육체의 상태가 한결같이 매우 평안하온지요’ 정도의 뜻이 되겠다. 건강 날씨를 묻는 말이다.기후 타령에 기력(氣力)이 부친다. ‘원기(元氣)’를 회복하여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살려야지. 날씨와 관련한 속담 중에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속담은 “어느 구름이 비 될지 모른다.”이다. 언제 어느 것이 복이 될지 모른다. 날씨에 순응하면서 긍정적으로 살아가야겠다.
2016.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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