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의 공연 메모 - 김덕수패 사물놀이와 KNUA심포니 오케스트라
의정부예술의전당 2012 신년음악회 김덕수패 사물놀이와 KNUA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어우러진 음악회2월 11일 오후 5시 의정부예술의전당 대극장사물놀이와 오케스트라의 만남 - 어떨까?대학오케스트라의 가능성을 뛰어넘어 우리나라 오케스트라 발전에 새로운 지평을 여는 활동으로 음악계에 젊은 활력을 불어넣고 있는 한국예술종합학교의 KNUA심포니 오케스트라.사물놀이의 창시자 김덕수우리 국악의 현대화, 대중화, 세계화를 이룬완숙한 예술적 역량을 펼쳐가고 있는 김덕수패 사물놀이 루마니아 에네스쿠 국제콩쿨, 스위스 티보바가 국제 콩쿨, 센다이 국제 콩쿨 등 수많은 국내외 유수 콩쿨에서 수상하며 각광받고 있는 바이올리니스트 신아라. 요한 스트라우스 ‘박쥐서곡’ ‘봄의 소리 왈츠’,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 최성환 ‘관현악 아리랑 환상곡’사물놀이 협주곡인 박범훈의 ‘신모듬 중 3악장’ 등
2012.02.13
2월의 공연 메모 - 뮤지컬
대한민국 대표 뮤지컬로 우뚝 선 뮤지컬 . 2010년 브로드웨이에서 찬사를 받고 금의환향한 자랑스러운 우리의 뮤지컬 에게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도 문을 열어 주었다.
그 감동과 여운. 사나이들의 의리와 조국애. 살이 돋는 듯한 숨막히는 열정들의 집합체.서예가로서 서예가 안중근의 모습도 보고...나라 사랑하는 마음... 그 영원한 숙명의 만남...안중근 의사의 의거 100주년을 맞아 제작된 이 작품은 35억원의 제작비가 투입되었고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의 암살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기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 민경옥 뮤지컬 연구소http://cafe.daum.net/mko21/3phd/1?docid=1I5ID|3phd|1|20091103103715&q=%B9%C2%C1%F6%C4%C3%20%BF%B5%BF%F5%20%C1%D9%B0%C5%B8%AE연출을 맡은 윤호진에 따르면 일본 관객들이 보더라도 안중근 의사와 일본 영웅인 이토 히로부미 모두에게 연민이 들도록 그렸다고 하며 지루하고 비극적일거라는 예상들이 있지만 실제로 뮤지컬은 다양한 볼거리를 가진 역동적인 작품으로 만들었다 한다.
뮤지컬 영웅 줄거리
1909년 목숨을 건 젊은이들의 가슴 뜨거운 싸움.조선과 일본,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넘나드는 일촉즉발의 위기 순간들."하늘이시여 도와주소서. 우리 뜻 이뤄지도록..."1909년 한반도를 중심으로 러시아 만주벌판에 이르기까지 일본 제국주의 세력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이때 러시아로 망명하여 본토의 일본군과 피의 전쟁을 벌이는 젊은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는데 바로 대한독립군이다.정부는 비밀조직인 제국익문사를 결성하여 독립운동을 돕는다. 대한독립군의 일원인 안중근은 제국익문사 요원들과 함께 러시아 자작나무 숲에서 단지동맹으로 결의를 다진다.제국익문사 요원 중 한 사람인 설희는 궁녀 출신으로 어릴적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지켜본 여인이다.설희는 그 한을 품고 일본으로 건너가 비밀 정보를 수집하여 독립군을 돕는다.
당시 일본의 만행에 피해를 입고있던 중국인들 역시 대한 독립군들의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특히 만두가게를 하는 중국인 왕웨이는 동생 링링과 함께 안중근을 비롯한 독립군들의 든든한 지원자가 된다.시간이 지날수록 한일합방을 목표로 하는 일본의 비열한 침략들이 빈번해 지고 그들의 악랄한 행동은 더욱 기승을 부린다.
반면 잇단 전쟁의 실패로 안중근을 비롯한 독립군들은 지켜만 간다.한편 설희는 게이샤로 분하여 이토에게 접근하는데 성공하고 황혼기에 접어든 이토 히로부미의 외로움을 달래주며 그와 가까워진다.독립에 대한 그 어떤 진척도 보이지 않던 상황에서 독립운동의 확산을 막으려는 일본군의 추격에 왕웨이가 위기에 처하게 된다.안중근은 고통받는 동료들을 보면서 분통한 마음을 감출수가 없다.그 때 일본의 설희로부터 이토가 만주 하얼빈에 방문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고,안중근과 그의 동지들은 본격적인 거사 계획을 세우는데...
뮤지컬 영웅 캐스팅안중근 역: 류정한, 정성화이토 히로부미 역: 이희정, 조승룡설희 역: 김선영, 이상은
2012.02.13
대구(大邱) 지명 이야기
대구(大邱) 지명 이야기
도정 권상호 편
대구의 옛지명은 ‘達句伐(달구벌)’이다. 지금도 ‘달구벌공원[達城公園], 달성군’이 대구에 있다. 신라의 국호가 한때 ‘계림(鷄林)’이었는데 글자 그대로 '달구벌'의 뜻이었다.
달구벌이란 대구 사투리로 '닭의 벌판'의 뜻이다. ‘벌’은 ‘벌판’, ‘언덕’이기도 하면서 ‘수풀’을 의미한다. ‘달구’는 ‘닭의’로 사투리로서 예컨데 ‘달구똥’을 들 수 있다.
계림(鷄林)을 흔히 경주만의 지역적 뜻으로 보려는 것은 오류이다. 협의적으로는 신라왕조에서 김씨왕실의 시조인 김알지가 금궤에서 발견된 경주 황성동의 숲을 계림(鷄林)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광의적으로 계림(鷄林)은 신라의 초기 국호였다.
신라가 멸망한 뒤에 경주보다 대구가 힘을 받으면서 달구벌의 의미는 대구에서 강하게 남아 있게 되었다.
한자로 ‘大丘(대구)’라는 명칭이 처음 나타나기는 신라 757년(경덕왕 16년) 주(州), 군(郡), 현(縣)의 명칭을 중국식 이름으로 고친 때부터이다. 그러나 이 개칭은 다음 혜공왕 이후의 기사에 옛 명칭인 達句伐(달구벌)도 그대로 나타나 있는 것으로 보아 한 동안 양쪽이 함께 쓰이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達句伐(달구벌)이 ‘大丘(대구)’로 바뀐 것은 통일 이후 唐(당) 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은 신라가 모든 제도 문물을 중국식으로 정비해 가는 변화의 한 산물이다. 달구벌이 大丘(대구)로 바뀐 것은 음을 딴 경우에 해당한다 하겠다.
‘丘(언덕 구)’ 자가 ‘邱(언덕 구)’로 바뀐 것은 조선왕조 영정(영조 정조)시대부터이다. 1750년(영조 26) ‘丘’ 자를 다른 자로 고치자는 상소가 있었다. ‘丘’ 자가 공자의 이름자인 까닭에서였다. 혼용되다가 철종 이후는 1850年년 공사 간에 모두 ‘大邱(대구)’로 쓰게 되었다.
여기에서 왕건, 견훤과 관련한 대구 지명을 살펴보기로 한다.
무태(無(없을 무) 怠(게으름 태)): 왕건이 병사들에게 ‘경계를 게을리 하지 말고 태만함이 없도록 하라.’라고 하였다는 설과 이곳을 지날 때 지역 주민들이 부지런함을 보고 태만한 자가 없는 곳이라 하여 유래되었다는 설이 전한다.
연경(硏(갈 연)經(날 경)): 왕건의 군사가 이곳을 지날 때 마을 선비들의 글 읽는 소리가 낭랑히 들려와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살내->箭(화살 전) 灘(여울 탄): 서변천과 금호강이 합류하는 지점. 왕건과 견훤의 군사가 살내를 사이에 두고 서로 쏜 화살이 강에 가득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파군치(破(깨뜨릴 파) 軍(군사 군) 峙(우뚝 솟을 치): 동화사와 파계사로 갈리는 길목에 있는 고개로 고려와 후백제의 전투는 이곳에서 가장 격렬하게 벌어져 결국 고려군의 참담한 패배로 결말이 난다. '군사를 깨뜨린 고개'라는 뜻이다.
나팔고개[喇(나팔 나, 叭(입 벌릴 팔)]고개: 지묘1동과 지묘 3동 사이의 나팔고개는 퇴각하는 고려군을 뒤쫓는 후백제군의 나팔소리가 산을 울렸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
지묘동(智(슬기 지) 妙(묘할 묘) 洞(동굴, 골, 마을 동)): 이 전투에서 가까스로 왕건(王建)이 목숨을 보전한 것은 잘 알려진 것처럼 신숭겸(申崇謙)의 지략 덕분이었다. 신숭겸이 왕건의 옷을 바꿔 입고 달려 나와 후백제군 속으로 뛰어 들었다. 힘이 다한 그가 후백제군에게 숨지자 승전에 취해 어수선한 틈을 타 왕건이 몸을 빼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곳의 마을 이름이 지묘동(智妙洞)인 것도 신숭겸 장군의 지혜가 교묘했다는 데서 연유하고 있다.
독좌암(獨(홀로 독) 座(자리 좌) 巖(바위 암)): 김락(金樂, ?~927) 장군마저 전쟁 중에 숨져버려 거의 홀몸이 된 왕건은 예상 도주로를 피해 동화천을 따라 동남쪽으로 달아났다. 봉무동 토성 산기슭에 왕건이 도주하다가 혼자 앉아 쉬었다는 독좌암(獨座巖)이라는 바위가 남아있다.
해안(解(풀 해) 顔(얼굴 안)): 뒤이어 도동 부근 들판을 지날 때 후백제군이 있지 않을까 근심했다가 무사히 빠져나가면서 왕건의 얼굴이 펴졌다고 해서 이곳 지명이 해안(解顔)이 됐다고 하는 속설도 전한다.
실왕리(失(잃을 실) 王(임금 왕) 里(마을 리)): 나무꾼이 나무를 다하고 내려와 보니 그 사람이 사라졌는데 뒤에 마을 사람들이 그가 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곳을 '왕을 잃은 곳'이라는 뜻의 실왕리(失王里)로 불렀다. 뒤에 음이 변하여 '시량이' 또는 '시랑리'라고 부르게 됐다.
대비사(大(큰 대) 悲(슬플 비) 寺(절 사)): 시랑리에는 현재 신숭겸 장군을 기리는 영모재와 비석이 있으며, 비문에 따르면 왕건이 뒤에 신숭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이곳에 대비사(大悲寺)를 세웠다고 한다.
안심(安(편안할 안) 心(마음 심)): 매여동을 비롯한 이 일대를 안심(安心)이라고 하는데 이곳에 이르러 왕건이 비로소 안심하게 됐다는데서 연유했다고 한다.
반야월(半(반 반) 夜(밤 야) 月(달 월)): 하늘에 반달이 떠서 그의 도주로를 비춰줬기 때문이란다.
은적사(隱跡寺), 안일사(安逸寺), 임휴사(臨休寺), 왕정(王井), 장군수(將軍水): 앞산계곡 어디에도 왕건의 얼이 스며있지 않은 곳이 없다. 앞산 쪽으로는 은적사(隱跡寺), 왕건이 달아나던 도중 혹시 추적해 올지도 모를 후백제군을 따돌리기 위해 자취를 감췄다는 뜻을 담고 있고 은신하면서 지냈고, 안일사(安逸寺)에서 조금은 편안하고 안일하게 지내다가 마침내 임휴사(臨休寺)에서 편히 쉬었고 안지랑골에는 왕건이 물을 마셨다는 '왕정(王井)'이 남아있으며 이 물을 장군수(將軍水)라고 한다는 전설(傳說)로 지금까지 절 이름도 그대로 불리어진다.
다시 김천(金泉) 황악산(黃岳山) 직지사(直指寺)에 이르러 능여선사(能如禪師) 도움으로 재기(再起)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능여선사가 하룻밤 사이에 짚신 2천 켤레를 삼아 진중(陣中)에 바치며 태조를 무사히 위험에서 벗어나게 한다. 그리고 말띠 해가 되면 큰일을 이루어지리라 예언하여 희망을 준다.
* 왕건(王建, 고려 太祖, 877~943): 본관 개성(開城), 휘 건(建), 시호 신성(神聖)이다. 금성태수(金城太守) 융(隆)의 아들이다. 29명에 이르는 많은 후비(后妃)를 두었는데 이는 혼인관계를 통해 호족세력을 통합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 견훤(甄萱, 후백제의 초대 왕, 867~936): 전주견씨(全州甄氏)의 시조이고, 본성은 이(李)이며, 아자개(阿慈介)의 아들이다. 상주(尙州) 가은현(加恩縣: 지금의 문경시 가은읍)에서 태어났다. 배다른 아들이 많아 부자·형제 사이에 불화와 반목이 그치지 않았는데, 견훤은 넷째아들 금강(金剛)을 유독 사랑하여 장차 왕위를 물려주려 하였다. 이를 눈치 챈 신검(神劍) 등 다른 아들들은 견훤을 금산사(金山寺)에 가두고 금강을 죽인 다음, 신검이 왕위에 올랐다. 3개월 후 금산사를 탈출한 견훤은 고려로 망명, 태조와 협력하여 10만의 대군으로 후백제를 총공격했다. 격전 끝에 후백제는 고려에 굴복, 936년에 멸망하였다. 甄(질그릇 견) 萱(원추리 훤).
* 예종 저 《도이장가(悼二將歌)》 1120년. 향가.
님을 온전하게 하시기 위한,
그 정성은 하늘 끝까지 미치심이여,
그대의 넋은 이미 가셨지만,
일찍이 지니셨던 벼슬은
여전히 하고 싶으심이여,
오오! 돌아보건대
두 공신의 곧고 곧은 업적은
오래오래 빛나리로소이다.
* 김락(金樂): 시호 장절(壯節). 918년(태조 1) 고려가 개국되자 2등공신에 책록되고, 927년 7월 원보(元甫) 재충(在忠)과 함께 대량성(大良城: 합천)을 공략하여 후백제의 장군 추허조(鄒許祖) 등을 사로잡았다. 그 해 공산(公山:대구)에서 견훤과 싸우다가 태조가 포위되자, 대장 신숭겸(申崇謙)과 함께 구하고 전사하였다. 태조는 지묘사(智妙寺)를 세우고 그의 명복을 빌었으며, 아우 철(鐵)은 원윤(元尹)에 올랐다.
* 신숭겸(申崇謙): 초명 능산(能山). 시호 장절(壯節). 평산신씨(平山申氏)의 시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전라도 곡성현(谷城縣) 출생으로, 《고려사》에는 광해주(光海州: 春川) 출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918년 태봉(泰封)의 기장(騎將)으로 배현경(裵玄慶)·홍유(洪儒)·복지겸(卜智謙) 등과 협력, 궁예(弓裔)를 폐하고 왕건(王建)을 추대하여 고려 개국의 대업을 이루었다. 927년(태조 10) 공산(公山)에서 견훤(甄萱)의 군대에게 태조가 포위되자 김락(金樂) 등과 함께 역전하여 이를 구출하고 전사하였다.
2012.02.09
인천(仁川) 지명 이야기
인천지명 이야기
도정 권상호 편
인천이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한 것은 조선 초기 태종13년(1413)이다. 그리고 인천(仁川)의 최초 명칭은 미추홀(彌鄒忽)이었다. 인천 지명의 역사적 변화는 매우 복잡하다. 그래서 먼저 근간을 정리해 놓고 난 뒤에 지명 변화의 흐름을 차근히 살펴보고자 한다.
미추홀(彌鄒忽, 백제) → 매소홀(買召忽, 고구려) → 소성현(邵城縣, 통일 신라 경덕왕) → 경원군(慶源郡, 고려 숙종) → 인주(仁州, 고려 인종) → 경원부(慶源府, 고려 공양왕) → 인주(仁州, 조선 태조 원년, 1392) → 인천군(仁川郡, 조선 태종 13년, 1413) → 인천도호부(仁川都護府, 세조 6년, 1460, 세조의 모후인 세종의 비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외향(外鄕)이므로 승격, 1883년 외세에 의한 개항) → 인천부(仁川府, 1895~일제강점기) → 인천시(仁川市, 1949) → 인천직할시(仁川直轄市, 1981년 7월 1일) → 인천광역시(仁川廣域市, 1995년 1월 1일)
인천 최초의 명칭은 ‘미추홀(彌鄒忽)’이다. 에 백제(百濟) 시조 온조왕(溫祚王)의 형인 비류(沸流)가 현재의 인천에 정착하여 미추홀로 명명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즉, 고구려의 왕자 비류가 불굴의 개척정신으로 문학산 부군에 도읍을 정하고 미추홀을 세우니, 이것이 인천 고을 발전의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본다.
삼국시대에는 격전지였던 인천이 고구려 영역으로 되었을 때는 '매소홀(買召忽)'이라 하였다.
결론적으로 ‘미추홀(彌鄒忽)’과 ‘매소홀(買召忽)’은 모두 ‘물의 고을’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보는데, 이는 미추홀의 ‘미’나 매소홀의 ‘매’는 ‘물’의 뜻이고, ‘홀’은 ‘성(城)’이나 ‘골(고을)’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운데 있는 음절 ‘추’나 ‘소’는 대개 사잇소리 ‘ㅅ’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추’나 ‘소’를 비류의 아버지 ‘추모(주몽, 동명성황)’로 본다면 ‘물이 있는 추모의 골’이란 뜻이 된다.
매소홀이라 불리던 인천은 후기 신라의 경덕왕 16년(757)에 이르러 ‘소성현(邵城縣)’이 된다. 경덕왕이 신라의 제도나 관직을 중국식으로 고치고, 토박이말의 땅이름을 모두 2자 중심의 한자어로 바꾸었던 때의 일이다. 곧 3음절의 ‘매소홀’을 2음절로 줄여 ‘소홀’ 곧 ‘소성’으로 개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소성현은 고려 숙종(1095~1105)에 이르러 ‘경원군(慶源郡: 경사의 근원이 되는 고장)’으로 개칭, 승격되었는데 이는 인천이 숙종의 어머니 인예순덕태후(仁睿順德太后)의 내향(內鄕:친정)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인주이씨(인천이씨)는 외척으로서 정권을 장악하여 가문의 영광을 누렸다. 그 뒤 인종(1122~1146) 때에는 왕의 어머니 인주이씨 인예순덕왕후의 고향이라 하여 ‘인주(仁州)’로 또 승격하였다. 이렇게 되면서 인천은 우리나라 역사의 중심지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인주이씨의 번성은 이자겸(李資謙)의 난으로 끝이 났다. 이자겸은 자기의 외손자요 사위이기도 한 인종을 폐위하고 왕이 되려고 꾀하다가 반란에 실패함으로써 인주이씨는 몰락하고 말았다.
인천은 고려말기인 공양왕(恭讓王) 2년(1390)에 다시 ‘경원부(慶源府)’로 환원 승격되는데, 그 이유는 ‘칠대어향(七代御鄕)’이기 때문이었다. 칠대어향이란 문종에서 인종에 이르는 7대 동안 인천이 왕의 외향이거나 왕비의 고향이었으므로 붙여진 말이다. 왕의 어머니와 왕비를 배출한 고을이 되면서 명문지역으로의 입지를 굳힌 인천은 칠대어향이란 칭송까지 듣고 고을도 승격되고 관할구역도 넓어졌다.
조선은 이런 경원부와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에 태조 원년(1392)에 다시 ‘인주(仁州)’로 강등되었다가, 태종 13년(1413)에 이르러 ‘인주’가 드디어 오늘날의 명칭인 ‘인천군(仁川郡)’으로 바뀐다. 모든 군이나 현에 '주(州)'가 들어 있는 고을을 모두 '산(山)'자나 '천(川)'자로 바꾸는 과정에서의 일이었다. '인산(仁山)'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이 고을은 물과 가깝기 때문에 '인천(仁川)'으로 명명했다.
다시 말해 인천이란 명칭은 인천이씨 왕비의 관향인 인주(인천)에서 유래된 것이며, 한자 뜻인 '어진 내(仁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인주이씨에서 유래되었다.
부천(富川)은 부평(富平)과 인천(仁川)에서 한 글자씩 따서 만들었다. 현재 인천 관할에 속한 부평(富平)도 조선시대에는 '부평도호부'였을 정도로 큰 고을이었는데, 1895년에 부천군으로 되고, 일제 강점기인 1914년에 인천부, 강화군, 남양군, 각 일부 지역과 통폐합되는 등의 변화를 겪었다.
다시 세조 6년(1460)에는 ‘인천도호부(仁川都護府)’로 승격했으니, 이는 인천이 세조의 모후인, 세종의 비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외향(外鄕)이었기 때문이다.
고종 20년(1883)에는 외세에 의한 개항이 이루어졌고, 고종 32년(1895)에는 ‘인천부(仁川府)’로 개편되었다가, 이후의 일제강점기에도 ‘인천부’의 지명은 그대로 사용되었다. 해방이 되고 1949에는 ‘인천시(仁川市)’로 1981년 7월 1일에는 ‘인천직할시(仁川直轄市)’로, 1995년 1월 1일에는 ‘인천광역시(仁川廣域市)’로 명칭이 변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이 때, 북구는 부평구로 명칭이 변경되고 계양·연수구가 신설되었다.
인천은 지금은 관할구역이 엄청 넓지만, 전에는 지역이 지금과 같지 않았고, 인접 구역과의 병합, 분리도 매우 심했다. 인천은 8구 2군 1읍 19면 123동으로, 현재는 국제공항과, 국제항만, 송도신도시 등 미래에 대한 희망과 비전을 가지고 있는 경제수도로, 문화 행사로는 세계도시축제를 펼치고 있다. [이 게시물은 권상호님에 의해 2012-02-09 02:58:24 도정동정에서 이동 됨] [이 게시물은 권상호님에 의해 2012-02-09 02:58:47 서예계소식에서 이동 됨]
2012.02.08
글씨 작업
1. 퇴임하는 김형근 선생님,2. 행복한 먹걸이(내일, 수 오후 3시, 서실에서)3. 선생님 안녕 하세요
김춘사입니다
저번에 글씨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또 다른 분들이 요청하셔서요 한 번 더 부탁드리겠습니다
(儉而不陋 華而不侈) 한문
검이불루 화이불치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라는 글귀입니다
글씨가 많아서요 가로 길이를 얼마로 해야될지 모르겠습니다.
검토 하신 후 연락 부탁드리겠습니다
김촌사 올림
2012.02.07
온종일 한자성어 작업 - 서울시의 부탁으로
1
2012.02.06
2월의 소중한 분들 - 도서 및 서류 정리- 보상금의 주인을 찾습니다.
보상금의 주인을 찾습니다. - 사단법인 한국복사전송권협회(krtra) 서울 강서구 화곡동 1063-3 중앙빌딩 8층 02-2608-2036~7문화의 숲 예술의 정원- 교실이 희망입니다. 학생이 희망입니다. - 한국교직원공제회대한민국의 모든 교실은 꿈을 키우는 인큐베이터입니다.학생들의 밝은 웃음소리는 대한민국의 내일을 밝힐 희망입니다. 월간 해인 5부 (2012년 2월호)한국문학신문(2012년 2월 1일호) 노원신문, 국보문학지. 2012년 서울시 평생학습 우수프로그램 공모 안내. - 서울시 평생학습포럼 홈페이지- 사업설명회 : 2. 7(화) 13:30 후생동 4층 강당 최상호 회장으로부터 - 재경예천군민회'서울미술협회 회보' - 논현1동사무소 5층 대강당에서(학동역 5번출구) 정기총회- 이경은 안재영 이인섭이상연 회장 - 모교 대창중고등학교에 장학금 1억 기탁.향군보(박세환 회장) - 정기총회 참석하지 못함(1월 13일) - 장진수 노원재향군인회장노원신문 - 내 삶의 든든한 이웃, 노원구청. 행복공동체. 더욱 편한 의자. - 김성환 노원구청장.명품 도시 노원을 만드는 데 화룡점정 - 원기복 노원구의회 의장'재경지보면민회 및 초회 송년의 밤 행사 개최' 기사 - 예천신문 '퍼포먼스' 사진 기사 대창고 후배 김태우 군 KBS '도전 골든벨 왕중왕 차지'권기선 총경(상리) '경무관 승진' - 영주경찰서장, 서초경찰서장, 경기지방경찰청 3부장정유준 시인 '편백나무 숲에서' - 부지런한 농부의 언어. (2012. 2) - 대장경 판각 분야 우리나라 최고 각수. 성헌서각 김기철 - '성헌서각' 로고 전각 새김. 가이드 - 행복한 미래를 위한 약속 / The K 손해보험.(에듀카)오직, 국민을 위해서만 무릎 꿇겠습니다. 낮은 곳에서, 열린 마음으로 국민과 함께 하겠습니다... --- 국회의원(노원 을) 권영진노원의 힘, 새로운 서울! 서울, 노원의 희망대변인 서울시의원 오승록(민주통합당) - 하계1도, 중계본동, 중계1동, 중계4동.희망찬 새해일마다 결실 - 한국도시설계학회장/ 한국과학기술원 교수 양윤재 서울 강남구 역삼동 635-4 한국과학기술회관----------------------Season's Greeting andBest Wishes forA Happy New Year.희망찬 새해가 밝았습니다.지난 한해 보내주신 성원에 깊이 감사드리며올해도 변합없는 관심과 격려를 부탁드립니다.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행정안전부 장관 맹형규.-------------------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나이 70에 한 권의 책을 펴냈습니다.황금같은 청장년 시절.치열한 경쟁과 승부의 삶지금은 유유자적하면서 조용하게 살고 있다.느낌을 주는 저서라기보다개인의 삶을 정리한 기록.굴곡진 삶을 살아온 것은 아니지만경험의 실체를 글로 정리.부끄러운 인생 고백수상집이라고 하기에는 밀도 모자랄 것입니다.가족 이야기선조의 훈도정신도.***** 김길홍(전 언론인, 대통령 비서실, 국회의원)------------그림과 손글씨서울미술협회 이인섭 이사장강남구 신사동-------------------새날...2012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전각)2012 한해는더 따스하고행복한 일만가득 있는아름다운 해가 되시길 소망합니다.*********** 별샘 김도임-------------------CD전통서각의 명가성헌 서각... 김성헌(경남 합천군 야로면 매촌리...) ------------------일흔에 부르는 노원 노래 - 우봉 김동익 전의장 고희시집 '내고향 토담길'노원 사모곡.곳곳에서 출판기념회 - 4월 선거를 앞두고 얼굴을 알리는 책들...순진한 농촌의 마음, 고향의 마음을 담아...각박한 도시에서도 뒷산 약수같은 마음의 청량제.모스크바 국립 심포니 오케스트라 내한공연 2012. 2. 3. 7:30 노원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지휘자 노태철 -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4번 바단조 작품번호 36번. - 요한 슈트라우스 - 트리치 트라치 폴카. '천둥과 번개' 폴카 - 푸치니 -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 - 구노 - 줄리엣 왈츠 - 생상 - 서주와 론도 카프리치오 - 라흐마니노프 - 여기가 좋아요. 아름다운 여인이여, 노래하지 마시오. 피아노 협주곡 3번 라단조 작품, 30번 3악장.동방대학원대학교 정상옥 총장 연하장 - 근하신희 ~돈수김성환 노원구청장 연하장 - '편한 의자'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신년인사회 초대의정부 예술의전당 사장 최진용(崔振用)님 연하장- 날마다 좋은 날도정 권상호 교수님, 희망찬 새아침에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오며 새해에도 변합없는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새해 자주 만납시다. - 小 낙관 준비경기도 의정부시 의정로 1 / 480-845추예랑서실 원장 嚴基喆(아호 東泉) - 龍翔雲起 - 깔끔한 낙관서울 송파구 석촌동http://kr.blog.yahoo.com/dongcheon0709한국비림원 허유 이사장 연하장 - 한중교류 내역충북 보은군 수한면 동정리 20-1 /한국예술문화원 - 예술인교육 세미나구미 강동병원장, 의학박사 신재학 - 연하장(소중한 가족의 건강 지킴이)* 고향 소식국민건강보험공단 김종대 이사장(용문 능천)
* 예언회: 예천 출신으로 서울 및 수도권에서 활동하는 언론인들의 모임인 예언회(醴言會·예천언론인회) 자견 12월 13일 창립
초대 회장에는 호명면 태생의 이대현(53) 한국일보 논설위원 추대박흥로(하리면 출생) SBS보도제작부장이 부회장,유택형(감천면 출생) 연합뉴스 뉴미디어 부장이 감사, 장의식(예천읍 출생·예경포럼 사무국장) 컨슈머 타임스황우섭(감천, KBS PD)... 20aud이대현 회장은 “회원 화합과 출향인들의 권익 향상, 고향 예천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우리은행 카드 2월 만기.
2012.02.05
건강지성(健康至誠)
건강지성(健康至誠)
도정 권상호
우스갯소리라 하기에는 시사하는 바가 큰 격언이 있다. 누구나 아는 분명한 세 가지…….
‘반드시 죽는다.’
‘혼자서 죽는다.’
‘빈손으로 죽는다.’
아무도 모르는 세 가지도 있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
‘어디서 죽을지 모른다.’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
이 여섯 가지 사실에 공통으로 들어간 단어는 ‘죽음’이다. 태어나지 않았다면 죽을 일도 없을 텐데,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죽는다. 죽어야 한다. 죽을 수밖에 없다.
영생은 영혼의 몫이다. 영원한 시간과 무한한 우주를 생각하면 짧은 인생과 좁은 육신이 야속하기만 하다. 그래서 인간은 영원과 무한을 약속하는 종교와 예술을 지어냈나 보다.
시간(時間)과 공간(空間)의 굴레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人間). 그래서 삼간(三間)이다. 여기의 시간은 ‘빛’이 만들어 낸 것이다. 다행히 빛은 누구에게나 골고루 비춘다. 광무사조(光無私照)라. 빛은 사사로이 비추지 않는다. 빛이 만물에게 공평하듯이 빛이 만들어 낸 시간도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이는 시무편애(時無偏愛)라 하면 되겠다. 시간은 사람을 편애하지 않는다. 빈부귀천에 따라, 의인악인에 따라 빛과 시간이 공평하지 않다면 얼마나 열 받는 삶일까. 그래서 잘난 놈, 못난 놈 따로 없이 누구나 똑같은 하늘을 머리에 이고, 똑같은 땅을 발로 밟고 살아가다가 속절없이 생(生)을 마감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빛과 시간처럼 죽음도 모든 이에게 공평하다고 할 수 있겠다. 빛과 시간을 막을 수 없듯이 죽음도 거역할 수 없다. 고로 죽음 앞에 모두 겸허해야 한다.
인간은 혼자서 태어났기 때문에 죽기도 혼자서 한다. 혼자서 죽는다는 사실. 설령 동반자살을 한 사람일지라도 엄밀하게 말하면 시간차가 있다. 사랑하는 가족과 친지, 그리운 벗들마저 모두 두고 혼자서 죽어간다. 그만큼 죽음은 냉엄하다. 강물이 속절없이 바다에 닿듯이, 우리의 영혼은 하늘에 이를 수밖에 없다.
혼자서 죽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서 덜 고독하고 싶어 한다. 아무리 나쁜 짓을 한 사람이라도 죽음 앞에서 우리는 겸허해 져야 한다. 부관참시(剖棺斬屍)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인간은 빈손으로 죽는다. 태어날 때, 빈주먹으로 태어났으니, 빈손으로 가는 것도 당연한 이치가 아닌가. 고로 본전인생(本錢人生)이다. 어차피 인생은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고 하지 않았는가. 지나친 욕심을 경계하라는 말이렷다. ‘영원히 살 것처럼 배우고, 내일 죽을 것처럼 베풀라.’라는 말이 있다. 열심히 배우고, 베풀 줄 아는 사람이 되라 뜻이다. 한때는 ‘배워서 남 주나?’라고 했지만, 이제는 ‘배워서 남 주자.’라고 해야 한다.
아무도 모르는 세 가지 중에 첫째는 ‘언제 죽을지 모른다.’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하루하루를 생의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겸손하게 살아야 한다. 오늘 하루가 내 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죽음을 준비하는 꽉 찬 삶. 내가 사는 오늘은 어제 죽어간 사람이 그렇게도 소망하던 내일이 아니었던가. 누구도 내일을 자신할 수 없다. 그러니 오늘을 충실히 살아가야 한다. 오늘 하루를 충실히 살아갈 때 영원(永遠)을 사는 것이 되고, 이 자리를 소중히 여길 때 무한(無限)을 얻는 것이다.
죽음 앞에서 허무한 삶. 어차피 허무한 인생일지라도 우리는 사랑으로 만나야 한다. 너와 나 사이에 사랑이 없다면 오늘 하루가 무슨 의미가 있으랴. 동그란 안경을 걸친 멋진 털보 아저씨, 스티브 잡스. 그는 갔지만, 애플사와 명언은 남아 있다.
“내가 하는 일을 계속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내가 이 일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사랑하는 일을 찾으셔야 합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야 하듯, 일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반드시 죽는다고 해서 방종한 삶을 살 필요는 없다. 단 한 번밖에 없는 일회성의 인생이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일회성이기 때문에 소중한 삶이다. ‘자살’을 뒤집으면 ‘살자’가 되는 이치와 같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살아있는 동안은 건강한 모습으로 오래 살고 싶어 한다. 양생(養生)을 통한 무병장수(無病長壽)에 열망은 도가(道家)뿐만 아니라 인류 모두의 바람이었다. 한데, 이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은 질병(疾病)이다. 금세기의 질병 중 인류의 최대 적은 암(癌)과 에이즈. 어쩌나.
공교롭게도 지난해 말에는 ‘암 예방’을 위한, 금년 초에는 ‘에이즈 퇴치’를 위한 라이브 서예를 펼쳤다.
지난 1월 20일, 남산의 유서 깊은 서울클럽에서 사단법인 한국에이즈퇴치연맹의 ‘김민기 회장 이임 및 김진호 회장 취임식’ 장에서 ‘건강지성(健康至誠)’이란 네 글자를 휘호했다. 건강을 얻기 위해서도 지극한 정성을 다해야 한다는 뜻이다. 건강 없이 오래 사는 것도 고역이렷다.
지성(至誠)이란 말은 에 나온다. 문자학적으로 보면, ‘지(至)’ 자는 새가 땅을 향하여 내려앉는 모양이다. 그럼에도 한 번도 뇌진탕에 걸리지 않으니, ‘지극하고 절묘하다.’ 하겠다. ‘성(誠)’ 자는 ‘말한 대로 이룬다.’라는 뜻이다. 거짓 없이 말과 행동이 일치해야 이룰 수 있나니, 여기에 ‘정성(精誠)’이 필요하다. 에이즈를 예방하고 ‘지극한 정성’, 곧 지성(至誠)으로 건강하게 살자는 의미에서 펼친 서예 퍼포먼스였다. 건강 없이는 아무 것도 없다. 얼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보고 들은 건강 노하우를 세 가지로 요약해 볼까나.
첫째, 언제나 웃음을 잃지 말고 긍정적 마음으로 살아갈 것.
둘째, 절식 속에 알맞은 운동을 즐길 것.
셋째, 끊임없이 하고 싶은 일에 도전하는 삶.
이 세 가지가 건강하게 잘 늙은 법으로, 늙어가는 즐거움을 더해 줄 것으로 믿는다.
2012.01.30
第五祖弘忍禪師述
해석을 부탁 받고...
禅
最上乘論
第五祖弘忍禪師述
....
但能著破衣飱麤食。了然守本真心。佯癡不解語。最省氣力而能有功。是大精進人也。
...
다만
떨어진 옷 입고, 거친 밥 먹더라도
분명히 본래의 眞心 지킬 수 있다면 그것뿐.
어리석어 말을 알아듣지 못한 체하더라도
氣力을 잘 살피고 능히 功이 있다면,
이것이 精進하는 사람이니라.
了然 : 분명하고 명백하다.
2012.01.27
글 무덤 그리고 작업 준비
토요일까지 노원신문월요일까지 한국문학신문또 토요일 점심시간까지는 '행복한 먹걸이' 간판용 로고 글씨,(강치봉 벽화작가 중계)김치국수를 주로 하는 franchise형 채인점현재 11개의 점포가 있단다.발전을 기원하며...2월 2일 오후 3시에는코엑스 3층 전시홀 D1에서 배스킨라벤스 신년행사장에서6*4미터에용 그리기와 슬로건 쓰기 준비! (이도플래닝 이건희님)- 이메일로 시안 보내기
2012.01.26
부산(釜山) 지명 이야기
부산(釜山) 지명 이야기
도정 권상호 편
부산(釜山)은 에 ‘부산(富山)’이라는 명칭으로 처음 보이며, 1470년(성종 1년) 12월 15일자의 기록에 ‘부산(釜山)’이라는 명칭이 처음 나타나는데, 1474년 남제(南悌)가 그린 「부산포지도」에는 여전히 ‘부산(富山)’이라 쓰고 있으니, 이 시기는 ‘富山’과 ‘釜山’을 혼용하여 썼던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후의 기록은 ‘부산포(釜山浦)’로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부산의 지명변천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1481)이 완성된 15세기 말엽부터는 오늘날의 ‘부산(釜山)’이라는 지명이 일반화 된 것으로 추정된다.
부산을 ‘부산(富山)’이라 한 것은 ‘많은 산’, 곧 산이 많다는 뜻이고, ‘부산(釜山)’이라 한 것은 그 산의 형태가 가마솥 모양으로 본 것에서 붙이 지명이다. ‘釜(가마 부)’는 ‘父+金’으로 짜여진 글자로 ‘큰 솥’, 곧 발이 없이 쇠로 만든 ‘가마솥’의 의미이다.
1481년(성종 12)에 편찬된 산천조에 보면, ‘부산(釜山)은 동평현(오늘날 堂甘洞 지역이 중심지였음)에 있으며 산이 가마 모양과 같으므로 이같이 일렀는데, 그 아래는 부산포(釜山浦)이다.’라고 적고 있다. 그 후 기록들은 이를 그대로 인용하여 ‘釜山’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외에도 동구 수정동에서 산을 넘어 부산진구 가야동으로 통하는 고개를 ‘가모령’이라 하고 ‘부산호장소(釜山戶長所)’의 문서에는 ‘시령(枾嶺)’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가모(可牟)’의 ‘감[枾]’은 ‘가마[釜]’를 음차한 것으로 본다. 가모령을 ‘시령(枾嶺)’으로 적는 것처럼 ‘가마재’, ‘가마고개’는 ‘부치(釜峙)’로 적고 있으니, 이는 곧 ‘부산재’이다.
그리고 동구 좌천동 뒤에 증산(甑山)이 있다. 옛 어른들은 이 ‘증산(甑山)’을 ‘시루산’이라고 하는데 ‘시루[甑(증)]’와 ‘가마[釜(부)]’는 같은 솥의 종류이다. 따라서 ‘증산(甑山)’은 ‘부산(釜山)’과 같은 말로 볼 수 있다.
부중지어(釜中之魚)는 생명에 위험이 닥쳤을 때 쓰는 말이다. 증진부어(甑塵釜魚)라는 말은 시루 속에 먼지가 쌓이고 솥에 물고기가 생긴다는 뜻으로, 몹시 가난하여 끼니를 거름을 이르는 말이다. 증산교(甑山敎)는 조선 고종 때 증산 강일순이 전라북도 정읍에서 세운 종교이다.
부산에 대한 민간 어원설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옛날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부산의 뒷산 속에 거대한 석상(石像) 하나가 서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 석상을 수호신처럼 모시면서 극진히 아끼며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왜구(倭寇)들이 쳐들어와 사람들을 해치고 재물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이때 산 속의 석상이 갑자기 두 손에 도끼를 들고 뛰어내려와 왜구들을 모조리 죽이기 시작했다. 결국 왜구들은 물러가고 석상은 묵묵히 다시 산속으로 들어갔으니, 이때부터 이 고을을 ‘斧(도끼 부)’ 자 ‘부산(斧山)’으로 부르기 시작했는데, 왜정 때 일본인들이 ‘斧(도끼 부)’ 자만 보고도 벌벌 떤 나머지, 이를 부산(釜山)으로 고쳐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釜(가마 부, 발 없는 큰 솥 부)로다.
좌우지간 부산은 국내에서 가장 ‘부산한’ 제1의 항구(港口) 도시이다.
港(항구 항, 뱃길 항)은 물속의 巷(거리 항)이다. 巷(거리 항)은 본래 衖(거리 항)으로 썼다. 衖(거리 항)은 ‘함께[공(共)] 쌩쌩 걸어 다니는[행(行)] 거리’ 모습 그대로이다. 巷(거리 항)의 사(巳)는 ‘卷(두루마리 권)’에 있듯이, 두루마리처럼 함께 빙빙 돌아다니는 모습이다. 항구(港口)는 항해(航海)하던 선박(船舶)이 들어오는 입구이다. 港(항구 항). 航(배 항). 抗(막을 항). 亢(높을 항, 목 항=項)은 발음이 같으므로 의미도 서로 통한다. 배가 들어오는 항구에서는 높은 곳에서 적함을 잘 막아야 한다.
배는 운항(運航)을 잘 해야 한다. 난항(難航)이나 결항(缺航)은 곤란하다. 항공기(航空機)를 싣고 다니면서 뜨고 내리게 할 수 있는 설비를 갖춘 큰 군함을 항공모함(航空母艦)이라 하고, 줄여서 항모(航母)라고도 한다. 항모의 순항(巡航)에 순항(順航)을 기원한다. 만일 적이 쳐들어오면 철저하게 저항(抵抗)해야 한다.
길을 가는 것은 行(다닐 행), 물 위를 다니는 것은 航(항해할 항)이다. 배를 타고 바다 위를 다니면 항해(航海)요,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면 항공(航空)이로다. 날틀은 물론 항공기(航空機).
강에 띄우는 작은 쪽배는 ‘舟(배 주)’, 바닷가 연안(沿岸)을 드나드는 정도의 배는 ‘船(배 선)’, 대해를 감독하는 큰 배는 ‘艦(군함 함)’이다. 선박(船舶)이라고 할 때의 舶(큰 배 박)에 흰 돛이 보이는가. 일엽편주(一葉片舟), 각주구검(刻舟求劍), 오월동주(吳越同舟)로다. 미국에는 제칠함대(第七艦隊), 러시아에는 북양함대(北洋艦隊), 우리나라에는 충무공이순신함(忠武公李舜臣艦)이 있다.
2012.01.26
서울 지명 이야기
서울 지명 이야기
도정 권상호 편
‘서울’이라는 명칭은 · 등의 기록에 보이는 ‘서벌(徐伐)·서나벌(徐那伐)·서라벌(徐羅伐)·서야벌(徐耶伐)’ 등에서 비롯되어 변천된 것으로, 신라 초기 도읍지의 지명인 동시에 국명이기도 하였다.
등의 중국 사서에 보이는 ‘사로(斯盧)·사라(斯羅)·신로(新盧)’ 등의 국명도 ‘서울’과 같은 음훈(音訓)으로, 서벌·서라벌 등의 다른 표기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백제의 도읍을 소부리〔所夫里- 부여의 옛이름도 소부리〕라 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현재 중국어 표기는 首尔(shou 3, er 3)이다. 2005년 1월19일 서울시 이명박 시장은 서울의 중문 명칭을 서울(首尔)이라 고치고 한성(汉城)을 쓰지 않기로 한다고 발표하였다. 이는 지명이나 인명 등을 부를 때 현지 발음을 존중해서 적기로 한 것에 기인한다.
서울의 본래의 뜻에 관해서는 몇 가지 이설(異說)이 있지만, 서(徐)·서나(徐那)·서라(徐羅)는 높고[高] 신령(神靈)하다는 우리말 ‘수리’·‘솔’·‘솟’의 음사(音寫)이고, 벌(伐)은 들판을 의미하는 우리말 ‘벌’의 음사이다. 따라서 ‘서울’, 즉 서벌·서나벌·서라벌은 ‘높고 신령한 들판’, 또는 ‘새 벌(판)’을 뜻하니, 곧 상읍(上邑) 또는 수도(首都)라는 뜻의 보통명사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서울 지명의 유래는 신라의 수도 ‘서라벌’에서 음이 변천해 서울이 됐다는 설과, 백제 때의 ‘소부리’라는 말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양립하고 있다. ‘서라벌’은 ‘새 벌’의 의미이고 한자로 음차하면 ‘신라(新羅)’가 된다. 그리고 ‘소부리’의 ‘소’는 ‘솟’·‘솔’·‘솟대’·‘솔개’의 뜻으로 ‘높다’는 의미이고 ‘부리’는 ‘벌’ 또는 ‘높은 곳’의 의미이므로, 백제의 ‘소부리’는 ‘높은 벌’·‘놓은 곳’이라는 의미가 된다. 백제의 수도 ‘부여(夫餘)’의 옛지명을 ‘소부리’라고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고구려의 옛 수도 졸본(卒本)은 본디 ‘솔본(率本)’의 오기로 이 말도 ‘서울’의 옛말 중의 하나이다.
‘서울’이 ‘서러워서 울다’에서 왔다는 민간 속설이 있는데, 이는 임병양란(壬丙兩亂)과 왜정(倭政)으로 인한 아픔에서 생긴 말이다.
일본을 한자로 倭(왜국 왜)라고 부르는 것은 폄하하는 말이다. 공식적으로는 일본제국시대를 줄여 일제시대(日帝時代)라 하지만, 민간에서는 일본에 대한 나쁜 감정 때문에 왜정(倭政) 때라고 불렀다. 또 임진년에 일본이 일으킨 난리를 임진왜란(壬辰倭亂)이라 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일본을 왜(倭)이라 불렀음은 왜소(矮小)한 민족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倭(왜국 왜)는 矮(키 작을 왜)와 통하기 때문이다.
왜(倭)와 같은 한자 가족으로 시듦을 뜻하는 위축(萎縮), 위임(委任)이 있다. 萎(마를 위), 委(맡길 위), 任(맡길 임)이로다.
또 한 가지 민간 어원설이 있다. 태조 이성계가 수도를 開城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고자 전국을 찾아다니다가 지금의 왕십리(往十里) 근처에서 휴식을 하게 되었다. 그때가 겨울이었고 너무나 지쳐서 앉아있는데, 웬 노인이 지나가다말고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키기에 그 쪽으로 가보니 눈이 신비하게도 성벽처럼 두르고 있었다. 그 눈길을 따라 그대로 성벽을 쌓고 도시를 만든 것이 雪鬱(설울), 곧 雪(눈 설), 鬱(막힐 울)에서 ‘서울’이 되었다는 것이다. 또 한 번 웃는다.
서울은 통일신라와 고려 후기 때는 ‘한양(漢陽)’, 조선시대는 ‘한성(漢城)’, 일제 때는 ‘경성(京城)’으로 불리다가, 1946년부터는 ‘서울’로 불리고 있다. 다시 말하면 ‘서울’은 어느 시대에나 늘 사용되던 보통명사에서 오늘날은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로 고유명사가 된 것이다.
조선왕조는 개국 후에 1394년 개경(開京)에서 한양(漢陽)으로 천도한 후, 1395년 6월 6일에 한양(漢陽)을 ‘한성부(漢城府)’로 개칭하고 태조 5년(1396) 4월에 한성부 행정구역을 동부(東部)・서부(西部)・남부(南部)・북부(北部)・중부(中部) 등 5부(部)로 나누고 이를 다시 52방(坊)으로 구획해서 방명표를 세웠다. 한성부의 관할구역은 지리지에 도성 밖 5리~10리까지로 하였는데 이를 ‘성저오리(城底五里)’, 또는 ‘성저십리(城底十里)’라고 하였다. 이상과 같이 태조 때는 한성부를 5부(部) 52방(坊)으로 하였다가 세종 때는 5부(部) 49방(坊), 영조 때는 5부(部) 46방(坊) 328계(契)로 축소하였으며, 고종 초에는 5부(部) 47방(坊) 339계(契)로,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 때에는 5부(部)를 5서(署)로 고치는 동시에 47방(坊) 283계(契) 775동(洞)으로 하였다.
1910년 10월 1일 일제에 의해서 한성부(漢城府)가 경성부(京城府)로 개칭되고 경기도(京畿道)에 예속(隸屬)되었으며, 1911년 4월 1일에 경기도령 제3호로서 경성부의 행정구역을 개정하여 도성 안을 5부(部) 36방(坊)으로 하고 도성 밖을 8면(面)으로 하는 5부(部) 8면(面)제를 하였다.
이를테면 5서(署) 중의 하나인 중서(中署)에는 서린방(瑞麟坊)・견평방(堅平坊)・경행방(慶幸坊)・징청방(澄淸坊)・수진방(壽進坊)・관인방(寬仁坊)・장통방(長通坊)・정선방(貞善坊) 등의 8방(坊)이 있었으며 그 아래에는 56계(契) 127동(洞)이 있었다.
그러니 ‘署(관청 서)’는 지금의 ‘區(지경 구)’, ‘坊(동네 방, 저자 방)’은 지금의 ‘洞(골 동)’, ‘契(맺을 계, 약속 계)’는 ‘統(거느릴 통)’, 당시의 ‘洞(골 동)’은 ‘班(나눌 반)’쯤으로 생각하면 되겠다. 방방곡곡(坊坊曲曲), 통반장(統班長)이로다.
보통명사로서 서울의 의미인 한자어는 수도(首都)이다. 都(도읍 도, 서울 도, 모두 도)로다. 생도(生徒)라고 할 때는 徒(무리 도)인데, 의미상 도(都)와 통한다. 지금 중국어에서 ‘도읍(都邑)’, ‘수도(首都)’라고 할 때의 도(都)는 ‘du 1성’이고, ‘모두’의 의미일 때는 ‘dou 1성’으로 읽는다.
都는 ‘者+邑’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의 者(놈 자)는 본래 煮(삶을 자)의 본자이다. 큰 솥에 콩을 통째로 잔뜩 넣고 삶는 모양을 본뜬 글자이다. 그런데, 者(자)를 ‘耂(로)+白(백)’의 합자(合字)로 보고, 나이 드신 어른[耂(늙을 로)]이 아랫사람을 낮추어 말한다[白(말할 백)]는 뜻에서 者(자)의 뜻이 ‘놈’, ‘것’으로 되었다고 본다. 장자(莊子)에 ‘생생자불생(生生者不生)’이란 말이 나오는데, 이는 ‘삶에 집착(執着)하는 놈은 도리어 살지 못한다.’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邑(고을 읍)은 ‘나라[囗(국)]의 명령[口(구)]에 절대 복종하는(卩=㔾, 무릎 꿇은 사람의 모양) 고을’이란 뜻이므로 都(도읍 도)는 결국 ‘어른[耂]이 말하면[白] 그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 고을’이라는 뜻에서 왔다. 邑(읍)의 巴(땅 이름 파, 큰 뱀 파)는 卩(병부 절)이 바뀐 것이다. 그렇다면 郡(고을 군)은 ‘임금[君(군)]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 고을’의 의미이다.
동명 유래의 예를 들면, 서울 동작구 흑석동(黑石洞)은 뜻 그대로 동네에 검은색을 띤 돌이 많아 ‘검은돌마을’이라고 한 데에서, 종로구 피마동(避馬洞)은 종로의 큰길을 가다 높은 사람이 가마나 말을 타고 행차하는 것을 멀리서 보면 피했다는 데서 유래했다.
또, 용산구 갈월동(葛月洞)은 과거 마을 부근에 칡[葛(갈)]이 많이 자란 데서, 종로구 후암동(厚岩洞)은 마을에 ‘두텁바위’가 있는 데서 그 이름이 지어졌다.
이 밖에도 돌곶이가 있는 마을 석관동(石串洞), 남이장군 집터에 탑을 쌓았던 연건동의 남이탑(南怡塔)골 등지가 눈에 띄는 이름이다.
지명의 유래를 생각하며 여행이나 답사를 해 보면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그 이유는 오늘을 살면서도 그곳의 역사와 자연을 생각하게 되고, 그 지명을 붙인 선조와 대화를 나누면서 걷는 길이기 때문이다.
* 참고 자료 :
(한국학중앙연구원) 사이트 : http://encykorea.aks.ac.kr/
첫 번째~네 번째 이야기, 이은식(서울시 지명위원), 타오름.
1751년(영조 27) 실학자 이중환(李重煥)이 현지답사를 기초로 하여 저술한 우리 나라 지리서.
성종 때, 노사신(盧思愼)ㆍ강희맹(姜希孟)ㆍ서거정(徐居正) 등이 엮은 지리서.
지명 한자로 찾기 사이트 : http://www.zonmal.com
2012.0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