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인천서예의 두 봉우리 - 검여와 동정
20세기 인천서예의 두 봉우리 - 劍如와 東庭 권상호(문학박사, 문예평론가)1. 들어가며국내 제3의 도시로 발돋움한 인천광역시는 인천공항이 있어 하늘길이 열려 있고, 인천항이 있어 바닷길이 열려 있다. 인천은 세계로 통하는 대한민국의 대문이자 대동맥의 역할을 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仁川’의 글꼴을 살펴보면 인천의 특성이 그대로 나타난다. ‘仁’ 자는 마치 ‘사람[亻]에게 하늘과 땅[二]’을 열어주는 모습이고, ‘川’ 자는 ‘활주로’ 또는 ‘뱃길’을 연상하게 한다. 인천은 이미 아시아는 물론 지구촌 물류 허브도시도 각광을 받고 있다. 이제 인천이 진정으로 살고 싶은 도시, 머물고 싶은 도시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친환경도시 그리고 친문화도시로 가꾸어 가야 한다고 본다. 지정학적으로 인천은 한반도 핵심 요충지로 황해와 접해 있고, 한강의 하류에 위치해 있으므로 여기에 문화예술의 향기를 더한다면 시대를 선도하는 세계일류도시로 재탄생하리라 본다.이 땅에서 가장 오래된 삶의 터전이었던 곳은 인천이다. 강화도 고인돌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인천은 가장 오랜 역사를 배경으로 지금은 바이오, IT 등의 최첨단 산업도시로 탈바꿈하고 있다. 만약 여기에 풍요로운 문화예술의 옷을 입힌다면 살기 좋은 허브도시, 특히 예술가들이 살고 싶은 창조도시로 재탄생할 것이다. 영국의 글래스고, 리버풀. 독일의 드레스덴, 프랑스의 파리, 이탈리아의 피렌체, 스페인의 마드리드, 일본의 도쿄, 미국과 중국의 문화도시 10곳 등 문화도시 인천을 만들기 위해서는 박물관, 도서관, 공연장, 전시장 등의 인프라 구축이 필요하다. 또한 문화 발전을 위한 시설만큼이나 그 속에 담길 콘텐츠도 중요하다. 여기서는 문화도시 인천을 꿈꾸며, 그 중에서 문자도시로서의 인천의 역사적 배경과 발전 가능성을 타진해 보고, 특히 인천이 낳은 20세기의 걸출한 두 서예가 劍如(검여) 柳熙綱(유희강)과 東庭(동정) 朴世霖(박세림)의 위상과 예술적 성과를 점검해 봄으로써 21세기를 선도하는 문화도시 인천의 위상을 제고하고자 한다. 2. 문자도시로서 인천의 역사적 배경인천시민의 인식 속에는 인천은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문자를 바탕으로 한 문화가 가장 빛났던 고장으로 지금은 세계적인 활자도시, 문자도시, 서예도시로 발돋움하고 있다. 문자와 관련한 인천의 연혁과 문자인프라 구축을 위한 노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詳定古今禮文(상정고금예문, 1234): 강화도는 고려가 몽골의 침략을 피해 개성에서 수도를 천도한 곳으로, 재조대장경을 만들기 전인 고려 고종 21년(1234년)에 ‘상정고금예문’을 금속활자로 찍어낸 기록이 이규보가 엮은 에 남아 있다. 상정고금예문은 고려 인종 때 崔允儀(최윤의) 등 17명이 왕명으로 고금의 예의를 수집, 고증하여 50권으로 엮은 책으로 현존하지는 않지만 기록으로 보면 세계 최초 금속활자본 직지(1377년)보다 43년 앞선다.2) 再雕大藏經(재조대장경, 1236~1251)을 만든 곳: 한글을 창제하기 전 인천 강화도 선원사에서 몽골 침략에 맞서 두 번째로 만든 대장경. 고려 고종 23년(1236)부터 38년(1251)에 이르기까지 16년간에 걸쳐 완성. 경판 수가 총 6,589권으로 81,258판이므로 8만대장경으로도 불리며, 현재 그 경판이 해인사에 봉안되어 있다. 고종 19년(1232) 몽고병의 침입으로 初雕藏經(초조장경)과 續藏經(속장경)의 판본이 불타버리자 강화도에 천도해 있던 왕은 그 4년 후인 1236년에 大藏都監(대장도감)을 설치하고 대장경 再雕(재조)에 착수하였다. 3) 鼎足山史庫(정족산사고, 1660): 조선시대 정부의 문서보관소로 설치된 계기는 摩尼山史庫(마니산사고)가 1653년(효종 4) 11월 實錄閣(실록각)의 失火事件(실화사건)으로 많은 사적들을 불태우게 되자 새로이 정족산성 안에 사고 건물을 짓고, 1660년(현종 1) 12월에 남은 역대 실록들과 서책들을 옮겨 보관하게 되면서부터이다. 현종 1년(1660).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정족산성 내부의 傳燈寺(전등사) 서쪽에 있었으며, ‘조선왕조실록’(=유네스코 지정 세계기록문화유산)과 ‘선원보’(왕실 족보) 보관이 중심 업무이었다. 4) 外奎章閣(외규장각, 1782): 1782년 2월 정조가 조선왕실의 儀軌(의궤)를 보관할 목적으로 강화도에 설치한 규장각의 부속도서관이다. 정조는 외규장각이 설치되자 원래의 규장각을 내규장각이라 하고, 서적을 나누어 보관하도록 하였다.5) 訓盲正音(훈맹정음, 1926):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한글로, 강화도 출신의 松庵(송암) 朴斗星(박두성) 선생이 7년간의 연구를 거쳐 1926년에 창제하였다. 1906년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於義洞普通學校(어의동보통학교) 교사로 있다가 1913년 濟生院盲啞部(제생원맹아부: 서울맹학교의 전신) 교사로 취임하여, 이때부터 맹인교육에 전념하기 시작하였다.6) 서예가 검여와 동정: 추사 김정희 이후 최고의 서예가로 평가 받는 검여 유희강 선생과 서예가이자 문화예술운동가인 동정 박세림이 인천에서 태어났다.7) 아래아 ᄒᆞᆫ글(1989): 인천 부평구 태생의 李燦振(이찬진, 1965~)은 소프트웨어 개발자이자 벤처 기업인으로 대한민국을 IT강국으로 발돋움하는 데에 밑거름이 된 한글 워드프로세서 아래아 한글을 개발하였다.8) 국립세계문자박물관(2022년 개관 예정): 인천 연수구 송도국제도시에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을 개관할 예정이다. 전 세계 문자의 보고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이 2022년 송도에 문을 연다. 전 세계 문자자료를 수집·전시하고 연구도 가능한 명실상부한 국립세계 문자박물관이다.3. 20세기 대한민국의 대표 서예가 – 劍如(검여)와 東庭(동정)인천은 교량으로 연결되어 있기는 하지만 해협을 사이에 두고 크게 두 지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는 마치 대한민국의 두 눈을 연상케 하는데, 곧 하나는 원인천과 부평 지역이고, 다른 하나는 강화군이다.엄밀히 말하자면 20세기 인천 대표하는 서예가 2인은 원인천 출신이 아니다. 辛亥生(신해생) 劍如(검여) 柳熙綱(유희강, 1911~1976, 66세 졸)은 부평 출생이고, 乙丑生(을축생) 東庭(동정) 朴世霖(박세림, 1925~1975. 51세 졸)은 강화도 출생이다. 동정은 14년의 시간적 거리를 두고 검여보다 늦게 출생했지만, 안타깝게도 1년 먼저 逝世(서세)했다. 따라서 동정의 일생은 오롯이 검여와 함께 호흡했던 시기이기도 하다.해방 이후 1949년에 일제 식민지문화의 잔재를 청산하고 민족미술을 고취하기 위해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가 개최되었다. 전쟁 발발로 공백을 두었다가 1953년에 제2회 국전이 열리고, 官(관) 주도의 전시로 잡음도 많았지만 1980년까지 이어졌다. 여기에서 1,2회 서예부 문교부장관상은 김기승(1909~2000), 3,4회 수상자는 최중길(1914~1979), 5,6회 수상자는 을 쓴 인천 출신의 유희강이었다. 검여는 앞서의 작가들과는 확연히 다르게 황정견 서풍에 북위 서풍을 가미하여 자신만의 개성을 살려서 썼다. 그리고 9회 문교부장관상 수상자도 인천 출신의 박세림이었는데 그는 구양순의 필의에 황정견 서풍을 더한 해서와 북위풍의 해서를 나란히 쓴 을 출품했었다. 물론 출품 제목을 같아도 내용은 서로 다르다. 두 분 서예의 공통부분은 황정견인데, 당시는 지금보다 시원한 필세의 황정견 글씨가 인기가 있던 시절이었다.아호가 주는 느낌으로 볼 때, 劍如(검여)는 칼과 같이 날카롭지만 東庭(동정)은 뜨락처럼 평화롭다. 검여가 서예계의 붓자루 劍客(검객)이라면 동정은 서예계의 다정한 園丁(원정)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인생으로 볼 때, 두 사람 모두 아픔이 크다. 검여는 중풍이라는 병마로, 동정은 가족력이라 할 수 있는 같은 짧은 인생으로 아쉬움이 있다.올해로 검여, 동강 선생께서 下世(하세)하신지 각각 45년, 46년이 되지만 두 분의 먹빛은 해가 갈수록 더욱 빛나고 있다. 현 시점에서 인천을 대표하는 검여와 동정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2020년의 비중 있는 두 전시회를 통하여 살펴보기로 한다.2020년 3월에 국립현대미술관 개관 50년 역사상 처음으로 서예기획전 ‘미술관에 書(서) - 한국 근현대 서예전’이 열렸다. 코로나19로 관람이 중단된 경우가 많았지만 서예가의 역할과 의미가 무엇인지 모색해 볼 수 있는 뜻깊은 전시였다. 이 전시회는 ‘조선미술전’(일제강점기)과 ‘국전’(해방 후 정부 주관)을 거치면서 현대서예로 다양하게 변화하는 과정을, 한국 근·현대 1세대 서예가 12인 소전 손재형(1902~1981), 석봉 고봉주(1906~1993), 소암 현중화(1908~1997), 원곡 김기승(1909~2000), 검여 유희강(1911~1976), 강암 송성용(1913~1999), 갈물 이철경(1914~1989), 시암 배길기(1917~1999), 일중 김충현(1921~2006), 철농 이기우(1921~1993), 여초 김응현(1927~2007), 평보 서희환(1934~1995)의 작품으로 보여주는 자리였다. 공간의 제약과 지역 안배 등이 작용하기는 했겠지만 이 중 인천을 대표하는 작가는 검여 유희강이었다. 손재형, 배길기, 고봉주는 인천 사람은 아니지만, 인천의 서예가들을 길러낸 작가들이다.같은 해 비슷한 시기에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에서 개최된 ‘韓國近代書藝名家展(한국근대서예명가전)에는 붓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서예가 23인 석봉 고봉주, 원곡 김기승, 영운 김용진(1878~1968), 여초 김응현, 일중 김충현, 효남 박병규(1925~1994), 동정 박세림(1925~1975), 시암 배길기, 죽농 서동균(1902~1978), 석재 서병오(1862~1935), 평보 서희환, 소전 손재형, 강암 송성용, 검여 유희강, 철농 이기우, 갈물 이철경, 월정 정주상(1925~2012), 학남 정환섭(1926~2010), 동강 조수호(1924~2010), 남정 최정균(1924~2001), 어천 최중길(1914~1979), 소암 현중화, 석전 황욱(1898~1993)의 작품이 전시되었는데, 여기에는 검여와 동정이 함께 초대되었다. 사실 검여와 동정은 20세기 인천을 대표하는 서예가라기보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서예가에 든다. 검여와 동정은 광복 이후 국전을 발판으로 명망을 얻어 인천 서단은 물론이고, 한국 서단에 큰 영향을 미쳤던 인물이다. 양인의 학서 과정은 차별성을 지니고 있다. 검여는 중국에 유학하여 회화를 전공하고 이를 서예에 도입하여 새로운 조형어법을 추구하였지만, 동정은 私塾(사숙)에서 한문과 서예를 수학했다. 인천은 두 대가의 예술혼을 불러일으킨 토양이자 길러낸 고향이다. 만약 인천이 外緣(외연)을 넓히지 않았더라면 검여는 경기도 富平郡(부평군) 石串面(석곶면) 始川里(시천리)(지금의 인천시 서구 시천동) 태생이고, 동정은 경기도 江華郡(강화군) 內可面(내가면) 黃淸里(황청리) 태생이므로 두 작가를 경기도 출신으로 미룰 뻔 했다.해방 후 인천시립박물관이 창립되고 자연히 이곳을 중심으로 많은 미술인들의 만남과 교류가 시작되었는데, 당시 이경성 관장을 중심으로 서예가로는 검여와 동정을 비롯하여 송석 정재흥, 무여 신경희, 우초 장인식 등이 주축이 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일제 강점기부터 서예에 조예가 깊었고, 전통이 있는 집안에서 자라나서 해방의 공간에서는 이미 일가견을 갖추고 있던 작가들이었다.4. 불굴의 예술혼, 검여 유희강검여의 본관은 晉州(진주), 雅號(아호)로는 ‘칼과 같이 견고하고 날카롭다’는 뜻의 劍如(검여)를 즐겨 쓰고, 柴溪外史(시계외사), 不咸道人(불함도인) 외에, 당호로 蘇阮齋(소완재), 夢鶴仙館(몽학선관) 등을 사용했다. 1911년 5월 22일, 경기도 富平郡(부평군) 石串面(석곶면) 始川(시천리, 현재 인천시 서구 시천동) 57번지에서 부친 性茂(성무, 1856~1911)와 모친 전주이씨 사이에서 독자로 태어났다. 검여의 인생은 성장기, 중국 유학기, 인천 활동기, 우수서예 절정기, 좌수 서예기 등의 5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1) 성장기(1~27세): 검여가 태어난 지 불과 28일 만에 부친이 작고하는 바람에 백부 正茂(정무)의 가르침 속에 성장했다. 4세 때부터 가학으로 서예의 토대가 되는 한문을 배우고, 16세(1926)에 3살 연상의 전주이씨 李玉種(이옥종)과 결혼했다. 24세(1934)에 신학문을 배우고자 성균관대학교 전신인 明倫專門學院(명륜전문학원)에 입학, 27세에 졸업한다. 장남 桓圭(환규) 출생한다.2) 중국 유학기(28~36세): 28세(1938)에 중국 유학길에 올라 북경, 상해 등을 전전하면서 8년간 체류한다. 이때 북경 동방문화학회에서는 중국서화 및 금석학을 연구하고, 상해 自由洋畫硏究所(자유양화연구소)에서는 서양화를 연구하였다. 이 시기는 검여 서예의 특성을 규정짓게 하는 중요한 시기로 北魏楷書(북위해서)의 골격과 회화적인 공간구성은 이때의 서화와 서양화 공부 과정에서 생성되었다고 본다.3) 인천 활동기(37~45세): 36세(1946)에 귀향하고, 이듬해에 장녀 小英(소영), 그 다음해에 차남 信圭(신규) 출생한다. 39세(1949)에 인천예술인협회 창립에 참여하고 충무부장에 선임, 40세(1950)에 미술연구회 회원, 인천문총 미술 부문에 주동적으로 참여, 42세(1952)에 박세림, 장인식 등과 함께 대동서화동연회를 조직하고 부회장으로 선임되었다. 제1회 서도예술전에 처음으로 서예 작품을 출품했다. 43세(1953)에 대한미술협회 회원으로 선임, 인천문총 주최 제3회 미술전에 양화와 서예를 동시에 출품하고, 제2회 국전에 처음으로 서양화 ‘念(념)’과 서화 ‘古詩(고시)’를 출품하여 입선했다. 44세(1954)에 인천미술협회가 탄생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제2대 인천시립박물관장에 취임하여 7년간 재직했다. 제11대 인천시립도서관장직을 잠시 겸직한 바 있고, 인천시문화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45세(1955)에 문총 인천지부 심의위원장에 선임되고, 인천시문화위원회 예술분과위원장에 선임된다. 국전 특선. 46세(1956)에 제2회 인천시문화상 미술부문 수상, 제6회 미협전에 유화 출품(이때까지 출품된 유화작품은 모두 22점) 이후에는 서예에만 몰두하였다. 이 시기는 다양한 비첩 연마와 국전 출품을 통하여 서예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한 시기였다. 송대의 황정견과 소동파, 청대의 등완백, 조지겸, 유용, 오창석, 조선 말기의 김정희 등의 서예를 공부하며 전서와 예서, 해서와 행서 등의 다양한 장르를 실험적으로 학습해 보던 때이다.4) 우수서예 절정기(46~58세): 46~47세에 연속으로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하고 ‘白江熊州聯‘- 白馬江聲通百濟 古熊州路拱三韓(백마강 소리는 백제와 통하고, 옛 공주 길은 삼한과 두 손을 맞잡고 있다.) 황정견 서풍에 북위 서풍을 가미한 작품이다., 48세에 국전 추천작가로 선정된다. 49세(1959)에 2책을 일지사에서 발행하고, 국전 초대작가에 피선된다. 제1회 개인전을 인천 은성다방에서 개최, 모두 50여 점의 작품을 출품하였는데 그 동안의 여러 서체를 섭렵, 연구한 결과물이라 본다. 51세(1961)에 문총 인천지부장에 피선, 국전 서예부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어 6년 동안 역임함. 재건 인천문화단체총연합회 최고위원에 선임, 초대 경기미협 이사장에 선출되었다. 52세(1962)부터 6년간 인천교육대학 강사로 서예 지도, 검여서예원을 종로 관훈동에 개설하여 후학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54세(1964)에 동경올림픽 한국현대미술전에 2점 출품. 서울 중앙공보관에서 제2회 개인전을 개최했다. 55세(1965)부터 홍익대 바로 앞서는 소전 손재형이 1963년부터 이듬해 1964년까지 홍익대학교 전임교수 역임., 명지대 3년간 강사 역임. , 저술함. 56세(1956)에 서라벌예대, 동덕여대 강사 2년 역임. 한국서예가협회 창립상임위원에 피선되었다. 57세(1967)에 1년 여간 월전 장우성 화백과 교유하며 사군자 등 동양화 기법을 습득하였다. 에 ‘완당론’ 발표, 제1회 검여서원전에 30여 명 참여 50점 출품하였다.주변 서예가들의 이력에 비춰볼 때 43세 국전 등단은 늦은 감이 있지만, 간단없는 입, 특선, 문교부장관상 연속 수상, 추천작가, 초대작가, 심사위원까지의 과정은 그의 실력을 인정받게 되는 계기가 된다. 특히 54세(1964) 때의 서울 중앙공보관 화랑에서 개최한 제2회 개인전을 통하여 검여체라 할 수 있는 북위해서풍의 행서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송대 첩학이 주는 미려, 노련함과 청대 비학이 주는 질기고 강인함이 조화를 이룬 독자적인 서풍은 우리나라 근대 서단에 검여의 존재를 뚜렷이 각인시켰다. 54세 전후부터 이른바 우수시대를 마감한 58세(1968)까지가 어쩌면 重厚(중후), 質朴(질박)으로 대변되는 검여 서예의 절정기라 할 수 있다.5) 좌수 서예기(59~66세): 58세이던 1968년 9월 7일 새벽, 뇌출혈로 쓰러져 의식불명, 2주일 만에 깨어났다. 그러나 오른쪽 반신불수와 실어증 증세이후 이후에도 각고의 노력으로 좌수서의 새로운 경지를 이룬다. 59세(1969) 6월 제4회 한국서예가협회전에 최초의 좌수서 작품 출품, 60세(1970)에 국전 초대작가로 좌수서 출품, 61세(1971)에 제4회 검여서원전 좌수작품 출품 등 불굴의 의지로 작품 활동을 이었다. 문인 및 기타 저명인들이 발기가 되어 신세계에서 제3회 회갑기념 개인전을 개최하고, 62세(1972)에는 서울특별시문화상 예술부문을 수상한다. 63세(1973)에 제4회 개인전을 서울화랑에서 개최, 좌수서의 경지를 한층 높여 상형문자를 주로 하는 새 작품을 선보인다. 65세(1975)에 제5회 개인전 ‘검여 유희강 자수전’을 신세계화랑에서 전시함과 동시에 제1집(일지사)을 출간하고, 국제서도연맹 일본전시에 2점 출품했다. 66세(1976) 4월에 중국 대화선지 34장에 달하는 대작 ‘石北詩(석북시) 關西樂府(관서악부)’ 가로 98cm, 세로 175cm, 길이 34m, 총 3024자에 이르는 대작 ‘관서악부’에 대한 애착은 70년대 초부터 나타났다. 작고 해인 76년에 발문을 다 쓰지 못하고 운명하였다. 임창순 선생이 지은 발문(총 20행, 매행 20여 자)을 8행까지 쓰고 세상을 떠났다. 나머지 12행은 임창순 선생이 채웠다. 劍光이 번뜩이는 작품. 險絶(몹시 험함)한 붓끝. 마라톤서예. 遒勁舒展(주경서전: 씩씩하고 굳세게 펼쳐나감), 險峭爽朗(험초상랑: 험하고 가파르지만 爽快하고 明朗함). 圓熟無碍한 경계.를 쓰기 시작하였으나 題跋(제발)을 끝마치지 못했다. 에 ‘좌수서도고행기’를 발표하고, 대구시립박물관 초대전 형식으로 제6회 개인전 개최한다. 그러나 10월 16일, 간송미술관의 사군자전을 관람하고 귀가 후, 절친한 화가 배렴의 사망 소식을 듣고 제문을 쓰다가 17일 새벽 고혈압에 의한 뇌출혈증이 재발하여 18일 한마디 유언도 없이 운명하기에 이른다. 유족으로는 부인과 2남 1녀를 남기고 있으며, 묘소는 경기도 김포군 검단면 오류리이다. 선생의 생가는 인천광역시 서구 시천동에 위치해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1990년대 중반에 철거되고 말았다. 지금은 아라뱃길 옆 매화동산에 검여 유희강 선생 생가마을이 조성되어 있다. 탄신 100주년 기념으로 2011년에 조성 이 시기는 강인한 정신력이 육신의 아픔을 극복할 수 있다는 인간 승리의 모습을 보여준 때이다. 우반신 불수의 몸으로 左手書(좌수서)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불굴의 예술혼은 누워서 그린 멕시코의 화가 프리다 칼로나, 루게릭병을 극복한 영국의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을 연상하게 한다. 좌수서는 일체의 기교나 속기를 배제한 순진무구의 서체라 할 수 있다. 이때는 중풍을 맞기 직전에 장우성 화백과의 교유 영향도 있겠지만, 중국 유학기에 학습된 서양화 잔영을 끄집어내어 이른바 ‘癸丑墨戱(계축묵희, 계축년의 붓 장난)’ 뛰어난 미감, 감각의 확장성이 시대를 앞섬. 서양화 기법을 접목한 모더니즘의 절실한 표현. ‘반드시 죽은 후 공개하라’는 유언.이 있어 더욱 그 의미가 새롭게 다가온다. 시대를 앞선 자신의 작품에 대한 몰이해를 염려했기 때문으로 본다.라는 장르를 연다. 묵희에는 甲骨文(갑골문)과 鐘鼎文(종정문)을 통하여 문자 추상을 즐기기도 하고, 문인화로서 물고기 觀魚圖에는 시천동 굴포로 흘러드는 개울의 遊魚를 보고 자란 검여의 유년기 모습이 떠오른다. 진지함보다 자유분방함에서 일탈의 즐거움이 나타나 있다.를 글씨처럼 단순화하여 표현하기도 하며, 단순한 묵선으로 추상적이면서도 기하학적인 화면구성을 시도하기도 했다. 다시 말하면 이 시기에 검여는 서화의 경계를 단숨에 무너뜨리고 새로운 조형질서를 창조했다고 볼 수 있다.아호 劍如(검여)에는 검여가 추구한 삶과 예술의 궁극적 지향점이 들어있다. 곧 ‘劍如(검여), 石如(석여), 瓢如(표여)’의 三如(삼여)이다. 곧 ‘칼같이 날카롭고, 돌처럼 단단하고, 박처럼 둥글게’는 검여의 인생철학이자 예술목표였다. 호 중에 蘇阮齋(소완재)가 있는데, 이는 그가 흠모하고 지향하던 蘇東坡(소동파)와 阮堂(완당)을 당호로 사용한 예로서 1965년부터 1976년 사이에 주로 사용하고 있다. 특히 강유위의 ‘광예주쌍집’ 서론과 소동파의 ‘神氣骨肉血(신기골육혈)’ 苏轼是宋代著名的书法家, 他与黄庭坚,米芾,蔡襄并成为“苏黄米蔡”,书法造诣极高。苏轼有一则关于书法的著名论断,那就是“书必有神,气,骨,肉,血,五者阙一,不为成书也”, 这句话表达了苏轼对于书法需要具备的条件要求. 이론에 공감하였다. 蘇阮齋(소완재) 뒤에 主(주), 主人(주인), 主人左手(주인좌수)를 추가하기도 했다. 검여를 일컬어 추사 이후의 최고 서예가라고 칭하는 이유는 그의 호 때문만은 아니라고 본다. 검여는 사후 이듬해인 1977년 10월에 현대화랑에서 유작전을 기념하여 제2집이 출간되었다. 1979년 10월에는 문화공보부에서 문화훈장을 추서하고, 1980년 5월에는 서화가, 문인 등의 친우와 문하생들이 묘소에 묘비를 건립하였으며, 1983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 기획전으로 유작전 개최 및 제3집을 출간했다. 1992년 10월에 인천시립박물관에서 검여 유희강 서예전을 개최하고, 2006년은 검여 서거 30주년이 되는 해로 검여의 뜻을 잇는 후학들의 모임인 ‘시계연서회’(회장 유기청)가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전시장에서 ‘제11회 시계서회전’을 개최하였다. 그리고 11월에는 인천문화재단에서 ‘인천 문화예술 대표인물 조명사업’ ‘인천문화예술대표인물조명사업’(인천문화재단) 첫 번째 인물은 2005년 우현 고유섭(1905~1944, 한국 최초 미학자. 탄생 100주년 기념), 두 번째 인물은 2006년 검여 유희강(1911~1976, 서거 30주기), 2007년 ‘남생이’ 소설가 현덕(1909~?), 2008년 훈맹정음 창안자 송암 박두성(1988~1953, 송암 탄생 120주년 기념), 2010년 시인 한하운, 2012년 인천시립박물관 초대 관장 석남 이경성. 2006~2012년에는 원로 문화예술계 관계자들의 구술을 채록하는 아카이빙 자료구축 실시하여 20여 인물들의 구술채록 완성.의 두 번째 인물로 선정하여, 검여 유희강 서거 30주년 기념 특별전을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전시장에서 개최하였다. 또한 ‘검여 유희강 선생 서거 30주년 기념 학술심포지엄’ 주제: 검여 유희강의 생애와 예술세계 劍如 柳熙鋼의 생애 - 이희환 (인하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강사) 劍如의 藝術形成과 特質 - 선주선 (원광대학교 서예과 교수) 劍如와 中國 近代書藝 - 곽노봉 (경기대학교 전통예술원 교수) 근현대서예사에서의 검여의 위치 - 이동국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학예사)도 열렸다.2019년에는 성균관대학교 박물관에서 '검여 유희강' 선생 특별전시회를 개최하였다. 이는 현대 한국 서예를 대표하는 검여의 유족들(유환규ㆍ유소영ㆍ유신규)로부터 수백 점의 작품을 기증받은 기념으로 ‘검무(劍舞) - Black Wave’ 주제의 특별전시회를 개최했다. 유족들은 성균관대에 작품 400점과 습작 600점 등 1천 점과 생전에 사용했던 벼루, 붓 등을 아무 조건 없이 기증했다. 선생은 일제강점기인 1937년 명륜전문학교(성균관대 전신)를 졸업한 바 있다.제자로는 하촌 류인식(夏村 柳寅植, 1921~2007, 87세, 경기 이천 출생) 하촌은 기운 넘치는 선비정신을 행서 예술로 승화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행서를 잘 썼다., 송천 정하건(松泉 鄭夏建, 1939~ , 경기 연천 출생), 남전 원중식(南田 元仲植, 1941~2013, 73세, 인천 출생) 등이 있다. 5. 열혈 문화운동가, 동정 박세림동정의 본관은 密陽(밀양), 雅號(아호)는 동정(東庭), 東民(동민), 南觀(남관), 우관(又觀)이며, 佛名(불명)은 玄覺(현각)이다. 부친 東觀(동관) 朴憲用(박헌용)과 모친 柳氏 (유씨) 사이에서 1925년 4월 20일 3대 독자로 태어났다.동정의 일생은 크게 4단계로 나누어 성장기, 단체활동기, 성숙기, 완숙기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1) 성장기(1~20세): 동정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서 21세가 되어서야 광복을 맞이한다. 동정은 6세 때부터 祖母(조모)로부터 천자문과 한글, 童蒙先習(동몽선습)을 배웠다고 한다. 지금도 남아있는 조모의 한글 글씨는 궁체의 전범을 보여주고 있다. 동정의 부친도 鄕土史(향토사) 박헌용(朴憲用)이 편저한 강화도의 지지(地誌). 기존의 6종의 강도지를 종합하고, 그밖에도 누락된 자료를 수집하여 1932년 간행함. 상·하 2책으로 엮었다. 모두 19장 60절로, 연혁·지세(地勢)·토지·호구·부세(賦稅)·기후·해류·물산·풍토·명소·고적·인물·문화 등으로 나누어 기술함. 江都란 四都의 하나로 지금의 江華. 고려 23대 高宗 때, 蒙古의 침입으로, 高宗19(1232)년 6월부터 24대 元宗 11(1270)년 5월 還都할 때까지 39년 동안의 임시 수도였음. 이곳으로 서울을 옮긴 후부터 이 이름이 생겼음를 저술할 만큼 당대의 文豪(문호)로서 시문에 능했으며,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다. 8세에 조모를 잃은 뒤에는 부친을 따라 한문과 서예학습을 시작했다. 한편 인천 海星中學校(현 인천남중학교)에서 현대적인 학문도 접하고 또 무사히 졸업하지만, 이해 15세(1939)세에 부친(60세)마저 잃게 된다. 동정은 이에 굴하지 않고 이때부터 더욱 발심하여 19세(1943)까지 私塾(사숙)에서 한문과 서예에 정진하였다. 이때는 구양순과 안진경 해서를 주로 썼다.2) 단체활동기(21~28세): 21세(1945)에 해방을 맞이하고 李意男(이의남)을 만나 결혼, 22세(1946)에 독자 泰丙(태병)을 낳는다. 동정은 23세(1947)에 인천예술인협회 총무부장, 대동서도협회 회장 취임, 대동서도협회 주최 공모전 심사 및 동 전람회에 8점을 출품할 정도로 단체활동과 작품활동에 적극적이었다. 27세(1951)에 문총구국대 인천지부 총무부장을 역임, 28세(1952)에 대동서도협회를 대동서화동연회로 개칭하고 사무국장에 취임하여 34세(1958)까지 봉사한다. 이해에 인천미술협회, 대한미술협회에도 가입하고 제1회 대동서화동연회전에 5점, 제2회 종합전시회에 7점을 출품했다. 3) 성숙기(29~40세): 동정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서예 스승은 是菴(시암) 裵吉基(배길기, 1917~1999) 선생이다. 시암은 吳世昌(오세창)으로부터 전서를 주로 사사 받았지만 동정에게는 歐陽詢(구양순) 해서 위주로 가르쳤다. 시암은 8년 연장밖에 되지 않지만 동정은 29세(1953)부터 지도 받았다. 그해 가을 제2회 국전부터 출품 1953년 제2회 국전에서 ‘古琴名帖’을 출품하여 첫 입선.하기 시작하여 6회(30세,1956)까지 국전에 연속 입선, 7~8회(31~32세,1957~1958) 국전에서는 특선하는 영광을 안게 된다. 이 과정에 다니던 서울한의과대학 일제강점기까지 억눌려 있던 한의사들은 해방과 함께 한의학 교육기관의 설립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1948년 설립된 '東洋大學館(동양대학관)'이 그 노력의 결실이다. 이 학교는 부산 피난 시절인 1951년 서울한의과대학으로 승격되었고 1955년 동양의약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했다. 이후 1965년 경희대학교에 흡수 병합되어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한의학과가 된다.은 30세(1954년 6월)에 중퇴하기에 이른다. 동정은 34세(1958)부터 3년 동안 매년 개인전을 개최하고, 그 이후 7회의 개인전을 더한다. 개인전을 개최하면서 동정은 자신의 서예세계를 넓혀나갔는데, 이 때, 鄧石如(등석여)와 趙之謙(조지겸)의 글씨도 익혔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학서 과정에서 연배인 검여와는 자연스럽게 교유하게 되고 또 그 과정에서 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고 여기에서 북위풍의 맛을 곁들이면서 동정체가 완성되었다고 본다. 8차례의 국전 출품과 이후 매년 10월의 국전 초대 출품, 대동서예협회전, 대동서화동연회전, 동정서숙전, 경향 각지의 크고 작은 동인전, 초대전, 한중일 합동서도전 등 실로 성실한 작가로서의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36세(1960)에 동정서숙 창설 지도, 인천문총 대표최고위원 역임, 그리고 인천시 문화상을 수상한다. 이해 10월 제9회 국전에서 마침내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하게 되는데, 이때 동정은 출품할 당시 素筌(소전) 孫在馨(손재형)으로부터 첨삭지도를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이 당시의 작풍은 黃庭堅(황정견)과 歐陽詢(구양순)의 필의가 가미된 北魏書風(북위서풍)의 글씨이다. 이후 동정은 왕희지 集字聖敎序(집자성교서)를 익혀 유려하고 활달한 행서를 즐겨 썼으며, 만년의 北魏書風(북위서풍)의 글씨는 독학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38세(1962)에 예총 경기도 지부 부지부장, 39세(1963)에 경기도 문화상 수상을 수상한다.4) 완숙기(41~51세, 1965~1975): 동정은 41세(1965)에 예총 경기도지부장을 맡으면서 급격히 많은 심사와 작품 출품으로 바빠진다. 그는 성실성을 인정받아 5회나 연임하게 되며, 인기가 많아 대학, 회사, 은행, 방송국 등에 출강 요청이 쇄도한다. 급기야 인천에서 동정서숙을 운영하면서 서울 종로에도 서실을 낸 배경에는 전각가 褱亭(회정) 鄭文卿(정문경, 1922~2008)이 있지만,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그의 단명의 단초(端初)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상황에도 그의 유작 대부분은 이때 이루어진다.이해에 인천시사 편찬위원, 경기연감 편찬위원 역임, 제14회 국전 서예분과 심사위원, 제5회 동정서예개인전 등을 모두 소화해 낸다. 42세(1966)에 파월장병지원 대책위원, 인천시향 운영위원, 5.16민족상 이사 역임, 인천시 행정자문위원, 불교단체통합회 지도고문, 석림회 고문, 43세(1967)에 반공연맹 경기도지부 운영위원, 인천시 감사장, 경기도 문화상 심사위원, 44세(1968)에 인천시 행정자문위원, 한국미술협회 경기도지부장, 45세(1969)에 대한불교 화엄종 고문, 경기도 가정의례실천 추진위원, 경기도 교육위원회 장학위원, 경기도 관광자문위원회 위원을 역임한다.46세(1970)에 동정서숙을 개칭한 ‘동정한묵회’ 이사장 취임, 인천시 감사장, 인천교육대학 강사, 경기도 감사장, 소성완석회 회장, 인천시 행정자문위원, 47세(1971)에 인천소년교도소 재소생 서예지도위원, 인천문화원장, 국전 서예분과 심사위원장, 민주공화당 중앙위원회 농어촌분과위원회 위원, 대학미전 서예분과 심사위원장, 인천시 도시공원위원회 위원, 경기도 장학회 위원, 강화문화재 고문, 중학교 무시험추첨 관리위원, 48세(1972)에 전국문화원연합회 이사, 기서문화 향토사연구회 회장 역임, 인천시 행정자문위원, 중앙선원중창불사 추진위원회 위원, 49세(1973)에 인천문화원 이사, 한전인천지점 서예부 지도, 인하대 서예반 지도, 중등교원자격연수회 강사, 경기도 교육감 감사패, 50세(1974)에 한국은행 인천지점 서예반 지도, 인천시장 감사패, KBS방송국 서예반 지도, 인천시장 감사패 등 실로 바쁜 일생을 보냈다. 어떻게 보면 서예 외에도 종교, 문화, 시정, 교육, 정치, 봉사활동까지 鐵人(철인)이라는 별명이 그에게 어울릴지 모른다. 조심스럽게 회고해 보면 너무나 많은 일을 사양하지 않고 최대한 수용하다가 보니 이것이 안타깝게도 단명의 원인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동정의 생애는 비교적 짧았지만 해방 이후부터 1975년에 생을 마감할 때까지의 약 30여 년간은 치열한 서예가로서, 사숙 및 대학 강의를 통하여 많은 후진을 길러낸 스승으로서, 민족의식이 투철한 참전 애국자로서, 많은 단체활동을 통한 문화운동가로서의 면모를 살필 수 있다. 제1회 동정서예개인전(34세, 1958, 강화군청회의실)을 고향에서 개최한 것과, 이 전시가 강화 초유의 미술행사라는 점에서는 애향심 또한 매우 깊다고 본다. 동정 하면 큰 체격(182cm의 키와 95kg의 몸무게)에 호방한 성품으로 만약 좀 더 오래 살았다면 정치가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자신의 물건은 자기 스스로 정리 정돈해야 하는 깔끔한 성미는 그의 해서 취향과 닮았다. 父慈子孝(부자자효)의 정은 부자의 아호에 잘 나타나고 있다. 부친이 자신의 호, 東觀(동관)에서 ‘東(동)’ 자를 따서 東庭(동정)이란 호를 지어준 것은 자식에 대한 사랑이요, 후에 동정 스스로 만들어 사용한 호, 東民(동민), 南觀(남관), 우관(又觀) 등에 부친의 호에 나오는 ‘東’이나 ‘觀’ 자를 그대로 사용한 것은 부모에 대한 효심의 발로이다. 아버지는 觀(관)하고 아들은 庭(동정)에서 뛰어노는 모습이 연상되는 호이다. 동정은 이에 더하여 庭(정) 자에서 庭試(정시)를 찾고 있는데, 이는 조선 시대에 경사가 있을 때에 대궐 안에서 보이던 과거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동정은 평생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처럼 분주히 살았다.제자로는 인천의 서맥을 잇고 있는 청람 전도진(靑藍 田道鎭, 1948~ , 평북 철산 출생), 대전대학교 교수 송암 정태희(松巖 鄭台喜, 1951~ , 충남 공주 출생) 등이 있다. 6. 나가며인천의 슬로건은 ‘살고 싶은 도시, 함께 만드는 인천’이다. 살고 싶은 도시의 절대적 조건은 문화와 예술의 인프라가 구축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인천은 지금까지보다, 예술가들을 더 수용하고 아끼고 지키기 위한 노력과 실질적 배려가 필요하다고 본다. 검여와 동정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해방공간의 혼란과 남·북 분단, 6.25전쟁과 민주화 시련 속에서도 인천과 경기도 문화발전을 위하여 헌신한 분들이다. 전란에도 인천의 혼이 담긴 박물관과 도서관을 지킨 분들이다. 특히 서예교육을 통하여 후진을 양성하고 죽어서도 작품 기증을 통하여 아낌없이 헌신한 분들이다.검여 유희강은 추사 김정희를 잇는 서·화의 대가이고, 동정 박세림은 검여와 어깨를 나란히 한 행서의 대가이다. 이들 외에도 인천을 빛낸 서예가로 송석 정재흥(松石 鄭載興, 1918~1988, 경기 화성 출생)은 초서로, 무여 신경희(無如 申卿熙, 1919~2000, 한의사, 강원도문화재로 지정된 고려태사 장절공 신숭겸의 묘비문, 서울장충단 공원에 있는 사명대사 동상의 글, 한의신문 제호)는 안진경체로, 우초 장인식(又樵 張仁植, 1928~1993, 66세)은 한글 궁체와 篆隷(전예)로 유명했다. 검여 유희강은 소전이 국전 심사를 하면서 발굴한 작가라 할 수 있고, 동정 박세림은 시암 배길기와 소전 손재형 양인의 영향을 받은 작가이다. 이외 우초 장인식은 시암의 문하이며, 송석 정재흥과 무여 신경희는 동정의 가르침을 받았다. 검여의 예맥은 하촌 류인식, 송천 정하건, 남전 원중식으로 이어지고, 동정 박세림의 예맥은 청람 전도진, 송암 정태희로 이어졌다. 청람은 지금도 인천을 지켜며 전각과 서예로 유업을 계승하고 있다.검여와 동정의 筆痕(필흔)을 감상하다 보면 묘하게도 인천의 미래가 얼비친다. 이는 이들이 인천에서 형제처럼 나타나 인천의 예맥(藝脈)을 이으며 20세기를 풍미하다가 떠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의 삶도 예술이었다. 점으로 꼬집고 획으로 간질이며, 농묵으로 포옹하고 갈필로 긁어주던 삶이었다. 인천이 그들을 버리지 않는 한 사랑의 먹, 인묵(仁墨)은 인천 시민의 가슴에 정서적 공감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인천은 한국의 제3의 도시로 발전했다. 도시 규모에 걸맞게 포용과 베풂의 문화도 뒤따라야 한다. 그러나 인천은 두 작가를 제대로 포용하지 못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인천이 지키지 못한 두 작가의 작품을 각각 성균관대학교와 대전대학교에서 지키고 있다. 부끄럽지 않은 예향으로서의 인천이 되기 위해서는 이들의 영혼이 찾아와 쉬고, 시민들이 공감하고 대화할 수 있는 사랑방과 같은 상설전시장을 어떤 식으로든 마련해야 한다고 본다. (끝)
2021.04.07
수선화와 붓글씨
一書易得 筆友難求(일서이득 필우난구) 인천의 서예, 전각가청람 전도진 선생께서 삼각산 도선사의 수선화를 보시고서실을 방문,일필휘지하셨다. 책 한권은 얻기 쉬우나필우는 구하기 어렵다.
2021.03.27
삼각산의 유래
수도가 있는 산은 '한산'이다.북한산은 남한산에 대비되는 이름으로 보통명사다.삼각산이 고유명사이다.백운대(中), 인수봉(東), 만경대(南)가 삼각을 이루고백운대 836.5미터보다 각각26.5미터, 31미터씩 낮다.
2021.03.27
4.19국립묘지
봄은 또 그렇게 오는가 보다.헛기침도 없이발자국 소리도 없이밤새 몰래 머리 염색하고꽃잎 몇 개 여드름처럼 달고불쑥 나타나는가 보다. 4월은 아직 저만치 남았는데땅속 의로운 피의 함성에 놀라수양버들 실실이 푸르렀다.
2021.03.27
서산대사의 해탈시 / 말버릇
화계사 현판 - 석파 대원군의 글씨(낙관 - 石坡 大院君章. 두인은 미확인 - '承杞菊一地* 千斤視官*明) 서산대사의 해탈시 근심걱정 없는 사람 누구인가?출세하기 싫은 사람 누구인가?시기질투 없는 사람 누구이며흉허물 없는 사람 어디 있겠나? 가난하다 서러워 말고장애를 가졌다 기죽지 말라.못 배웠다 주눅 들지 말라.세상살이 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말버릇 하루를 살아가면서 많은 말들을 합니다.당신이 자주 쓰는 말은 어떤 말인가요?혹시... 힘들다.지겹다.안 된다.화난다.괴롭다.짜증난다. 이런 말을 하지는 않았나요? 당신이 무심코 뱉는 말들을운명의 귀가 듣고 있습니다. 이제 바꿔보세요...즐겁다.감사하다.행복하다.운이 좋다.다 잘된다. 그러면 분명히 운명이 바뀔 것입니다. --- 화계사에서 얻은 글입니다.
2021.03.27
書藝家, 모두가 써밋summit이다 – 죽림 정웅표
治心保静 - 宋 司馬溫公 書藝家, 모두가 써밋summit이다 – 죽림 정웅표- 나이가 들면 누가 잘 쓰고 못 쓰고가 없다. 죽림일현(竹林一賢)독락청담(獨樂淸談) 죽림 정웅표 선생의 전시 관람을 위해 인사동 백악미술관에 들렀다.홀로 충남 靑陽에 살며, 인생 만년을 작품 제작에 몰입하고 있다.서재 주변에 대숲(대울)을 만들고, 대를 완상하며 살아가고 있다.붓과 더불어 살아가는 붓 지기 죽림 정웅표 선생.한 해 동안 먹 농사를 지어, 매년 전시회를 통하여 그 수확의 결과를 가늠한다.죽림만의 특별한 ‘추수감사절’이라 할 수 있다. 한 작품, 한 작품 숨어있는 이야기 재미가 솔솔하다.스토리텔링이 있는 작품전. 카톡으로 부탁받은 내용을 메모하듯 써 놓은 작품이 있는데...자세히 보니 누런 1호 봉투에다 썼다. – 어쩌다 지구상에서 가장 출세한 봉투라고나 할까?몸에 밴 아끼는 습관 때문에 쓰고 남은 자투리 종이 쪼가리도 잘라서 쓴다. 내용과 형식의 조화가 중요하다.다음 글자나 옆줄을 염려하여지금 쓰고 있는 글자가 구속을 받아서는 안 된다.‘지금’이란 ‘순간’이 소중하게 다가올 때, 글씨 쓰는 맛을 느낄 수 있다. 이를 테면 내일 때문에 오늘이 구속받으면 안 된다.- carpe diem.쏟아질 듯 먹을 흠뻑 머금은 채 쓴 글씨- 번짐의 미학. 윤택하다. 붓 세 자루를 동시에 잡고 구사한 즉흥적 작품,- ‘piano 三重奏’를 표방한 ‘筆아노 삼중주’. 나이가 들면 잘 쓰고, 못 씀이 없다.인생이란 밭에 나름의 꽃과 열매를 맺는다. 서예는 흐트러짐이요 자연이다.뚱뚱함의 기준도 서로 다르듯이그냥 자신의 내면을 진실하게 표현하면 된다.‘竹林癡墨’이란 謙虛한 호가 새롭다.나이를 먹을수록 겸손도 국물처럼 마시는가 보다. 選文에 그닥 신경 쓰지 않는다.책을 펼쳐 놓고 讀書하듯이 죽 써내려 간다.寫書라고나 할까? ‘曲水’라는 簡明한 작품,曲 자는 팔뚝을 구부린 모양이다.- 절차고(折釵股). 殘墨을 처리하다가 얻은 작품도 재미있다.스키시紙는 純紙처럼 번짐은 없지만 표구하기가 쉽고, 수명도 길다.글씨의 수명은 종이의 수명과 비례한다.순지의 경우, 수명은 길지만 번짐이 없다.기름기를 좀 빼낸 중성지가 좋다. 예서와 초서를 섞어 쓰기도 했다.여러 서체를 한 작품에 섞어 씀은듀엣 연주와 같은 긴장감을 준다. 작품의 가장자리를 잘라서 무슨 글자인지 알 수 없는 것도 있다.‘읽는 서예’에서 ‘보는 서예’로의 변화라고나 할까?서양화 비구상에서 아이디어를 얻기도 한다.쓰다가 脫字가 있으면 집어넣으면 된다. 쟁자위처럼... 疎疎密密의 ‘筆하모니’도 흥미롭다.文鎭으로 쓴 글자를 눌러서는 안 된다.뼈만 있고 살이 없는 글씨도 있다.‘대울’이라는 낙관은 송하 백영일씨의 새김이란다.한문에 한글 도장도 필요하다. 본문도 어려운 漢詩인데, 도장까지 漢字로 찍으면 중국 서예로 인식한다.켄트지처럼 미끄러지는 종이에 쓴 글씨도 있다. 번지지는 않지만 깔끔한 맛이 있다.畫宣紙가 접힌 부분엔 붓이 떠서 그냥 지나가는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절대 加筆은 하지 않는다. 秋史와 梅月堂의 시를 쓴 작품이 많다.평소 존경하나 보다. 작품 면면을 보면 臨機應變의 자리가 많다.始終如一보다 隨時處變을 따르나 보다.흰색과 먹뿐인 예술... 붓과 종이나마 다양하게 사용해야 하지 않을까?내용 전체를 쓰지 못한 작품도 있다.더 읽고 싶으면 검색하여 찾아보면 될 일이다. 쓴 것 중에 골라서 출품하고 나머지는 태운다. 같은 내용을 두 번 쓰지 않는다.글씨를 만들려고 들기 때문이다.압지는 절대로 누르지 않는다. 번지면 번지는 대로... 儒家보다 老莊風의 글씨라 하겠다. 글자는 오른쪽이 살짝 내려오게 써야 균형이 잡힌다.닭털로 쓴 작품도 있다. 거칠지만 어쩌랴. 붓이 귀하던 옛날엔 닭털을 엮어서 쓰기도 했다.屋漏痕처럼 흘러내리게 쓴 글씨도 있다. 재즈풍의 글씨랄까?章法에 변화를 주기 위해 落款文을 본문 안쪽으로 들여쓰기도 했다.대련 본문에서 ‘한 一’ 자가 있으면 허전하다.이럴 때, 바로 낙관문과 낙관인으로 빈 공간을 채우면 된다.
2021.02.28
온라인 전시
자연은 신의 작품이고, 예술은 인간의 작품이다. 작품은 작가의 창작물이지만, 작가의 손을 떠나는 순간 하나의 독립된 유기체적 성격을 지닌다. 이는 곧 작품은 무생물이 아니라 생물로 볼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무릇 작품이 유기체로서 생명을 가지고 있다면, 작품은 무엇을 먹고 살아남는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작품은 ‘이야기(story)’를 먹고 자란다고 본다. 작품의 주식은 그 작품에 대한 관심에서 나오는 이야기이다. 문제는 작가가 작품을 탄생시킬 때, 작품의 부모라 할 수 있는 작가는 창작에 얽힌 ‘이야기 DNA’를 심어주어야 한다. 2021 Kwon Sangho's 1st On-line Calligraphy Exhibition아무도 살아보지 못한2021 신축년 1월. 아직은 며칠 남은 듯합니다.남들이 어떻게 지내냐. 하고 물으면,숨쉬기운동은 열심히 하고 있어요. 라고 대답합니다.백신이 개발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코로나 바이러스의 기세는 등등합니다.그렇다고 주저앉을 수는 없습니다.코로나 시국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먹고 싸고 잠자는 일밖에 없었습니다.밥값이나마 하기 위해운동은 붓체조, 휴식은 독서로 정했습니다.붓을 마구 흔들고 돌리다 보니어린시절 운동회 때 곤봉체조 하던 추억이 되살아납니다.혹시 올림픽 종목에 붓체조 종목은 없나요?https://blog.naver.com/ksh17141715/222217837605
2021.01.25
歲末 美學講義
歲末 美學講義 塗丁文字硏究所 모난 틀 속의 그림이 전하는 무한한 속삭임 – 시리 허스트베트 / 신성림 그림은 대체로 창문의 구조를 흉내 낸 사각형이다. 회화는 작품 전체가 동시에 존재한다.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영화를 볼 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작품을 경험하는 것과는 다르다. 시작도, 중간도, 끝도 없다. 변함없는 정적 속에서 시간 바깥에 존재한다. 영원한 현재. 예도 마찬가지지만 그 위에 붓이 지나가는 얼마만큼의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이 다르다. 철학이 말하는 - 이하준. 예술에서 美란 – 순수미, 특성미, 우아미, 숭고미, 비장미, 골계미. 醜의 미학.고급예술과 대중예술 - 현대미술에서는 이분법의 해체예술은 천재들만의 놀이인가? - 예술천재 담론의 역사, 그 비판. 예술과 외설 내가 주은정 옮김작업실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한 기록. 일기 형식 태진미 지음. 생각나눔잠재력, 창조 예술적 발상이 플러스되면 당신의 가치가 Up됩니다.매력, 그 놀라운 힘. 다름의 허용. 많은 사람들은 서구의 것이 우수하고 세련된 것이고, 우리 것은 고루하고 진부한 것이라는 선입관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 것은 서양과 다른 것이지, 틀린 것이 아니다. 예술은 삶 속에 있다. - 예술적 만남과 창조교감이 필요하다 – 역동적 소통의 코드 변화, 시대를 읽는 소통의 코드당연함을 부정하라100점짜리 예술은 없다 초심, 관찰하라 어린아이처럼중심, 필요를 발견하라 과학자처럼열심, 나만의 채움에 도전하라 예술가처럼뒷심(endurance), 가치 있는 변화를 일으키라 지도자처럼 36폭 –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백인산 1938 보화각. 1966 간송미술관 – 본존, 연구, 전시. 국보 12점, 보물 10점.관람객, 순례자, 참배객 – 헌화 배례하는 분도 있다.문화재는 관광 상품이 아니다. 전시는 그 자체로 미술품에게 상당한 스트레스를 준다. 수집, 보존, 연구가 우선이고 전시와 홍보는 그 다음이다.가헌 최완수 선생님 – 실천이 뒤따르는 공부를 해야만 한다. 문화예술품은 그 시대 문화 역량의 총화. 겸재 정선, 혜원 신윤복은 간송미술관이 양적 질적으로 으뜸.간송 전형필과 위창 오세창 - ‘문화로 나라를 지킨다’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는 말은 아는 것밖에 안 보인다는 말도 될 수가 있다.서양 그림과 같은 강렬한 자극은 아니겠지만, 맑고 깊은 맛이 있다. 우리의 문화적 유전자와 가장 잘 맞는 그림들이라 할 수 있다.어떤 식으로든 그 대상과 소통하게 되면 관심이 생기고, 관심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알고 싶은 마음이 든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학문적 깊이와 예술적 소양을 겸비해야 제대로 된 문인이라 생각했다. *** 壬子閏月之望 月城金光國 盥手敬觀율곡 학파의 문인들에게 신사임당의 그림은 마치 가문의 품격과 위상을 담보하는 紋章(문장)과 같은 역할을 했다. - 원추리꽃과 패랭이꽃세상에 이름을 날릴 뛰어난 재주(名世絶藝)명나라 명필이자 화가인 岳正의 포도론. 고려 중기부터 묵죽이 시작, 유교문화가 꽃을 피웠던 조선왕조에 이르러 더욱 풍미. 문학 분야에서는 송강 정철의 한글 가사와 石洲 權韠의 진경시가 나오고, 글씨에서는 석봉 한호의 석봉체가 출현했다. 그림 쪽에서는 사군자 계열의 문인화가 앞장서게 되니, 바로 탄은.혜원 – 은밀한 선정성, 향락적 풍취, 냉소적 해학. 筆端尋雪原 : 붓끝이 설원(화선지의 비유)을 찾으니書室滿墨香 : 서실이 묵향으로 가득하다.塗丁耽墨 : 도정이 먹을 즐기다. 김정희 - 高士逍遙 : 세한도와 더불어 추사의 지향과 본질을 보여 주는 대표작이다.진경시대 저물고 북학의 시대 열림. 겸재가 진경시대의 꽃이라면, 추사는 북학시대의 꽃이었다.“자네는 화가의 삼매경에 있어, 천 리 길에 겨우 세 걸음을 걸었을 뿐이네.” - 제자 소치 허련에게 한 말. 신조 - 法古創新(법고창신).문인화는 순박함과 천진함을 최고의 경지로 여긴다. 매끄러운 기교나 기발한 재치는 속되고 천박하게 생각한다. 그보다는 오히려 ‘서툶’을 귀하게 여긴다. 일부러 하지 않는 ‘서툶’.海東第一通儒. 書, 畵, 文字香 書卷氣(풍부한 학식과 높은 정신성)書畫不分論此國香也君子也. (국향군자)積雪滿山 江氷闌干, 指下春風 乃見天心 (쌓인 눈 산을 덮고, 강 얼음 난간을 이루나, 손가락 끝에 봄바람 이니, 이에서 하늘 뜻 알다.) 居士題‘寶覃齋(覃溪 翁方綱을 보배로 아끼는 집)’ ‘經經緯史(經學을 날줄로 하고, 史學을 씨줄로 하여 학문을 익히고 세상을 경영해야 한다)’라 새긴 인장을 잇달아 찍었다. 추사의 학문관.覃(미칠 담; ⾑-총12획; tán, 깊고 넓다, 퍼지다) 본디 글자는 鹵(로)+曰(왈)+子(자)임. 짠맛을 나타내는 鹵(로)와 삶는다는 뜻의 「돼지해머리(亠☞머리 부분, 위)部+口+曰」과의 합자(合字). 짠맛이 나는 삶은 음식의 뜻. 覃恩(담은)①은혜(恩惠)를 널리 베풂 ②상사(賞賜: 임금이 칭찬하여 상으로 물품을 내려 줌)ㆍ사은(赦恩) 등(等). 임금이 베푸는 은혜(恩惠) 又峯 조희룡 - 梅花書屋香雪海(향기로운 설원)훗날 위창 오세창은 우봉을 ‘墨場領袖(묵장의 우두머리)’라 賞讚했다.領袖會談. 領袖는 본디 옷깃과 소매를 뜻하는 말. *‘梅花書屋圖’의 화면 우측 중간에 쓰인 題跋.竇窠中得一故紙구멍난 보금자리(좀 먹은 벽장) 속에서 묵은 그림을 얻었다. 乃二十載前 所作梅花書屋圖也바로 스무 해 전에 그린 다. 蓋遊戲之筆 而頗有奇氣장난스러운 붓놀림이나, 기이한 기운이 있고 爲烟煤所昏 殆若百年物연기에 그을려 거의 백년은 된 것 같으니 畵梅如此 況人乎매화 그림이 이런데, 하물며 사람이랴! 披拂之餘 不覺三生石上之感펼쳐보니 뜻하지 않게 죽었던 사람을 다시 보는 느낌이다. - 丹老(단로): 趙熙龍(조희룡)의 호. 호산(壺山) 등 여러 개 있다.三生石: (중국의 사전에만) 전생의 인연.
2020.12.28
2021 신축년 연하장 어떻게 쓸까
코로나19의 재확산으로 인하여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서예 지도자과정'의 마지막 교육론 및 행서 실기 수업을 할 수 없게 되어 아쉽습니다. 그리하여 마지막 수업을 위하여 그 동안 짓기도 하고, 책을 읽다가 메모하기도 하며, 검색을 통하여 수집해 온 새해 연하장 글감들을 소개합니다. 우선 내용을 차분히 읽어나가다가 쓰고 싶은 글감이 있으면 옮겨적고, 자형이 잘 떠오르지 않는 글자는 자전 검색을 통하여 어울리는 서체를 찾기 바랍니다. 내용을 숙지한 뒤에 써야 필흥(筆興)을 불러 일으킬 수 있습니다. 실기 동영상은 방학 동안 수시로 촬영하여 총무를 통하여 카톡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궁금한 점은 언제나 질문하세요. 제 전화번호는 아시죠?연말연시를 지혜롭고, 유익하게 잘 보내시길 소망합니다.*우리말로 새해 축하의 글 쓰기새해 복 많이 지으세요!꿈을 향해 걸어요. 소처럼 뚜벅뚜벅.소에게 배운다. 큰 걸음을.새해 새꿈 - 몽땅 이루소서.無頉(무탈) - 좋은 일 바라기보다 아무 탈 없기를...回避三密(회피삼밀) - 密集(밀집), 密接(밀접), 密閉(밀폐)각자 받는 사람과의 관계를 생각하여 제치있게 창작해 보세요!*영어로 새해 축하의 글 쓰기Happy 牛 year!Happy New Year!Happy the year of Ox!Wish you lots of luck for the Ox year. (황소의 해에 많은 행운을 기원합니다.)*한자 성어로 새해 덕담 쓰기3~4자.新年好 Xīnnián hǎo (새해 복 받으세요!)吉祥如意 Jíxiáng rúyì (행운을 빕니다.)大吉大利 Dàjí dàlì (운수대통하세요.)恭喜发财 Gōngxǐ fācái (돈 많이 버세요.)新年快樂 Xīnnián kuàilè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萬事如意 Wànshì rúyì (모든 일 뜻대로 이루소서.)壽山福海 (수명은 산과 같고, 복은 바다와 같다.)壽福康寧 (오래 살고 복을 누리며 건강하고 평안하소서.)千祥雲集 (좋은 일들이 구름처럼 생기길...) *千 자를 天으로 잘못 쓴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有志竟成 (뜻이 있으면 마침내 이루어진다.)靑雲萬里 (입신출세의 큰 꿈을 지녀라.)修身養德 (몸을 닦고 덕을 기르라.)無汗不成 (땀을 흘리지 않고서는 어떤 일이든 이룰 수 없다.)不狂不及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牛年謹身 (소의 해에도 몸가짐을 조심하소서.)鴻圖大展 (원대한 계획을 크게 펼치소서.)牛報平安, 牛兆豐年, 力大如牛, 牛氣衝天, 牛運當頭 Niú yùn dāngtóu.(소 해 행운이 왔어요).牛年吉祥, 牛年大運、牛年如意, 牛年大吉、牛兆豊年、牛運亨通、牛年順利, 牛運亨通. 勤儉如牛.원래 신축년은 방위로는 西方, 색깔로는 白色이므로 白牛의 해이지만, 白이 죽음을 뜻하기도 하므로, 오행의 서방 金에 따라 金牛로 표현하는 것이 좋습니다.金牛賀春, 金牛迎春、金牛賀歲、金牛報喜、金牛獻瑞、金牛獻吉、金牛旺財、金牛纳福、金牛頌春、金牛送寶、金牛送福、金牛送喜、金牛進寶、迎接金牛.瑞牛迎春、瑞牛運財、福牛迎春、福牛呈祥、靈牛送福、5자.財神跟随你!Cáishén gēnsuí nǐ (부의 신이 당신을 따르기를.) *跟(발뒤꿈치 근, 쫓아가다, 따라가다.)上帝保佑你!Shàngdì bǎoyòu nǐ (하나님의 축복이 있기를.) *佑(도울 우)菩薩愛護你!Púsà àihù nǐ (보살은 당신을 사랑합니다.)6자.朋友好? 牛年到! (친구여 안녕? 소해가 온다!)共夢美好前程. 행복한 미래를 함께 꿈꾸자.牛年到好運到. Niú nián dào hǎoyùn dào. 소의 해에 행운을 빕니다.
2020.12.20
3밀을 피하자 - 밀폐, 밀집, 밀접
3密을 피해야 한다.삼밀이란 密閉, 密集, 密接을 뜻한다.코로나19 팬데믹pandemic으로 인하여 3密은 피해야 한다.학교, 음식점, 종교시설 등이 멈춰 섰다.그런데 오늘 타 본 지하철은 1밀, 2밀도 아닌 3밀 그 자체였다.퇴근시간이라 그런가?
2020.12.10
세상은 넓고 가르칠 일은 많다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서예 교육론권상호무엇인가를 가르친다는 것은 엄밀히 말하자면 '나를 기르는 작업'이다.따라하는 사람보다 창의적인 사람을 길러야...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나부터 변해야 한다.부자는 돈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돈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다.진정한 서예가는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이 아니라, 글씨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다.= Educational Freedom이제부터는 공부의 독립심이 요구된다. 생각에 혁명이 필요하다.시간에 대한 패러다임을 바꾸자 - 좋은 것을 싸게보다, 새로운 것을 빨리.시간을 소중히 다루는 사람이 부자다. 시간을 어떻게 쓸 줄 아는 사람이 되자.쓴 다음에 여유자금 만들지 말고, 여유 자금 만들어 놓고 써라.일하고 남는 시간에 공부하지 말고, 공부하는 시간 만들어놓고 일하자.--- --- '셀프 서비스'의 탄생 배경'나를 돌보자' '나에게 집중하다' - 생각의 core 근육(척추, 골반, 복부까지 지지하는 근육)을 기르자.'붓만 세우지 말고, 나를 세우자' - '엄근진' 같은 냉정함 버리고 자유롭게. 즐거움과 재미 추구!나만의 '습관'과 'routine'(운동선수들이 최고의 운동 수행 능력을 발휘하기 위하여 습관적으로 하는 동작)을 만들자.서예 독서 학교 - 성장, 발전, 융합, Fandom 형성을 위한 관계 형성이 중요하다.어디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검색으로 길을 모색하다)건강백세 서예 강사, 캘리그라피 강사 / 웃음, 치매 예방, 노래 강사, 건강 체조해외(재외) 한국문화원 서예 강좌, 해외 일반인을 위한 서예 강의.문화센터 서예 강사 모집평생학습 프로그램 강사 모집주민자치센터 프로그램 서예 강사 모집주민자치센터 프로그램 캘리그라피 강사 모집문화원 교육원 서예 강사, 문하재단 서예 강사평생교육원 서예 강사노인정 서예 강사 / 실버 서예백화점 문화센터방송국 문화센터신문사 문화센터대학 평생교육원 / 대학 사회교육원자율학습 프로그램 서예방과후학교 종합지원센터, 방과후수업 서예, 캘리그라피 강사 모집,특기적성 교육 서예개인 강사, 위탁 강사앨빈 토플러 - '지구촌은 이제 강자와 약자 대신에 빠른 자와 느린 자로 구분될 것이다.'
2020.12.05
지금 팔리는 것들의 비밀
최명화 교수 – 메아리방 효과(자신의 생각에 동의하는 사람만 남게 되는 현상)를 넘어 나비효과가 나길...개는 주인, 고양이는 가르치려고 하면 안 된다. 유혹해야 한다. MZ세대.- 기성세대보다 donation이 더 많이 한다. ‘북극곰 구하자!’와 같은 사회운동도 더 적극적이다. 1. 여러 개(個)보다 똘똘한 하나 – 혼을 담아서. 감성이 느껴지는 브랜드.카리스마 넘치는 감성 홍보 2. 프로슈머(열혈 소비자들) - 빠들. 날마다 sns엔 빠들의 설전이 전쟁을 방불케 한다. 그걸 보고 있노라면 인간은 평화를 추구하는 존재가 아니라 전쟁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승리의 깃발아래 두길 원한다. 안타깝게도 빠들은 가장 원시적인 무분별 그룹이다. 그나마 2분법적인 사고는 낫다. 지금이야말로 다분법적인 사고, 곧 열린 사고가 필요한 시대이다.예) 어마무시한 BTS도 처음에는 트위터에서 싸움이 있었다. 불안감 등이 터져나오고, 힙합에서 3등 정도였으며, 해체설까지 나돌았다. 3. 지금은 ‘개인’에게 눈을 돌리기 시작한 세상. 바람직한 몬스터. 요즘 아이들 – 아이패드를 가지고 논다. 그래서 ‘인간관계도 on, off’로 생각한다. 어른들은 서운하고 아깝다고 생각하기도... 이를테면 영혼의 단짝을 인스타그램 속의 우즈베키스탄의 친구로 삼기도 한다. 그럼에도 세상은 발전한다.*인스타그램(Instagram)은 ‘인스턴트’(instant)와 ‘텔레그램’(telegram)이 더해진 단어다. ‘세상의 순간들을 포착하고 공유한다’(Capturing and sharing the world’s moments)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2010년 출시됐다. 창업자는 스탠포드대 선후배 사이인 케빈 시스트롬과 마이크 크리거다.*‘욜로족’(지금 나에게 충실할 것)의 시대이다. 그들은 ‘현재의 행복’을 중요하게 여긴다. ‘욜로족’의 가장 큰 특징은 그 누구보다도 자신의 현재적인 욕구에 충실하다는 점이다. 계획적인 소비보다는 ‘그때그때의 욕구와 관련된 소비 활동’을 더 선호한다.4. ‘개념소비’란 합리적인 경제관념을 가지고 재화를 소모하는 일을 뜻한다. ‘미닝아웃’이란 신념을 뜻하는 ‘미닝(Meaning)’과 ‘벽장 속에서 나오다’라는 뜻의 ‘커밍아웃(coming out)’이 결합된 단어이다. 남들에게 밝히기 힘들어 함부로 드러내지 않았던 자기만의 의미나 취향 또는 정치적ㆍ사회적 신념 등을 소비행위를 통해 적극적으로 표출하는 현상을 뜻한다. ‘소확행(小確幸)’, ‘케렌시아(Querencia)’ 등과 더불어 서울대 소비트렌드 분석센터의 2018년 대한민국 소비트렌드로 선정되었다.커밍아웃처럼. 내 철학이 키워드, 개인이 중요해진 시대. 내 맘에 들려고 하지 마. 주변 눈치 보지 말고, 니 맘에 들면 돼. 5. 디지털라이즈, 개인화 - 명함 필요 없음. 구독시대. 이 시대의 정점.. 또 새로운 세상. 발전으로 본다. 회귀? LP판. 인간성 회복 운동도. ‘인간답게 살기’ 거대 담론... 마케팅을 통한 철학 산책 시간이었습니다. - 굿 케릭터. 마케팅을 통한 생활철학 담론 시간이었습니다. - 나의 엉뚱한 방송. 콜라보 많이 해야. 패션, 음식 등과...인사이트 – 익숙한 것에 각을 비틀기. 완전한 새로운 것은 없다. 장땡 마케팅. 당근(당신 근처) - 중고거래. 곰표 밀가루에서 ‘모든 하얀 거’...빙그레... 인스타를 통한 친근감.사람의 마음을 파는 것이다. 배려와 존중이 핵심.
2020.1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