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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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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제16호에 소개된 작품 - 한국전각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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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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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를 생산하는 스마트 서예가

정보를 생산하는 스마트 서예가   서예는 건강에 좋다. 요즈음 말로 하자면 서예를 하면 힐링이 된다. 그래서인지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서예가(書藝家) 중에는 장수(長壽)한 사람이 많았다. 베이징대 왕위에찬(王岳川) 교수는 논문과 토크쇼에서 건강과 장수를 위한 최고의 방편이 서예라고 했다. 그에 의하면 역사적으로 저명한 서예가의 평균 수명은 78.9세, 고승(高僧)의 평균 수명은 66세, 황제(皇帝)의 평균 수명은 39.2세였다는 것이다. 필자의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 역대 서예가의 평균 수명은 77.8세로 파악된다. 이는 해동서성(海東書聖) 김생(金生, 711~791)으로부터 여초(如初) 김응현(金膺顯, 1928~2007)까지 24명의 평균 수명 값이다.이상의 예에서 보면 서예가가 어떤 직종보다 월등히 긴 수명을 누리고 있는데, 여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도대체 서예의 어떤 특성이 건강에 도움을 줄까? 우선 서예는 마음 수행과 몸 수행이 이상적으로 결합된 예술이므로 건강에 좋다고 본다. 흔히 서예를 정서 순화에만 도움이 된다고만 생각하는데, 알고 보면 서예는 관절운동의 연속이다. 붓글씨를 쓰는 일은 몸이 기중기(起重機)가 되어 벼루의 먹물을 끊임없이 화선지 위로 퍼 나르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리고 서예를 오래 하면 해녀의 무자맥질이나 요가에서의 풀무 호흡과 정뇌 호흡처럼 호흡이 깊고 길며 뇌를 맑게 해 주어 폐와 심장이 튼튼해진다.그런데 당대에 와서는 서예인들의 수명이 일반인과 별반 다를 게 없다고 본다. 더구나 안타깝게도 단명하거나 심지어 자진(自盡)하는 서예가도 더러 볼 수 있었다. 왜 그럴까? 이는 서예 환경이 혼자서 또는 여럿이 어울려 즐기던 문화에서 공모전이나 파벌에 의한 경쟁 풍토로 바뀜에서 오는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본다. 서예가 깨우쳐주는 여백의 미학을 통하여 삶의 여유를 터득해야 할 터인데, 온갖 공모전 출품에 의한 점수 따기와 줄 세우기, 입상에 따른 끊이지 않는 금품수수의 잡음은 붓을 잡는 순간부터 가슴을 옥죄어 온다.붓을 통한 자유의 노래를 다시 부르자. 환경에 온전히 자신을 맡기는 물처럼, 허공에 온몸을 허락하는 바람처럼, 화선지 위에 내 붓 길을 맡기자. 좋은 글귀를 만들며 심미안(審美眼)을 기름으로써 스트레스를 확 떨쳐버리자. 비록 소소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소중한 내 삶의 먹 기록에서 행복을 찾도록 해야 한다. 기록이 쌓이면 인생의 스토리가 된다.서예를 가르치는 사람은 따라 쓰기 기술자가 아닌, 스마트한 서예가로 길러내야 한다. 스마트한 서예가란 정보기기 활용과 타 장르와의 콜라보 등을 통한 정보 생산자를 길러내야 한다는 말이다. 대학 학부에서 서예과가 사라지고 대학원 과정에서마저 고령화 내지 세대단절이 오고 있는 까닭은 미래지향적인 컴퓨터교육과 스마트한 인터넷 활용 교육이 커리큘럼에 없기 때문이라고 본다. 발견의 아름다움과 정보 생산자가 되도록 교육했어야 하는데, 케케묵은 정보 수용자만 길러냈기 때문에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고 본다. 선학(先學)이 보여준 것은 과거로의 회귀를 통한 현실 도피였다. 선대의 어려운 문장이나 시구를 남들이 잘 알아보지 못하게 씀으로써 어쭙잖은 현학(玄學)을 뽐내기에만 바쁘다 보니 미래를 내다볼 눈을 가질 수 없었다.도정 권상호
2021.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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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품격

[인천의품격] 열혈 문화운동가 ‘동정 박세림’

10기 송암예술아카데미 ‘인천 근현대 예술인의 삶’4편 권상호 동방문화대학원 교수 ‘동정 박세림’ 강의  인천투데이=이형우 기자 l 인천이 배출한 절정의 서예가는 검여만 있는 게 아니다. 인천 문화 발전을 위해, 인천의 혼을 지키기 위해 헌신한 사람. 일필휘지, 글씨를 단숨에 써 내리는 서법으로 알려진 사람. 한국 서예계에서 검여와 어깨를 나란히 한 사람. ‘동정 박세림’ 선생이다.권상호 동방문화대학원 교수가 송암미술관이 주관한 송암예술아카데미 ‘인천 근현대 예술인의 삶’에 출연해 인천 서예의 봉우리 동정 박세림 선생의 삶을 얘기했다. 아래는 강의 내용 일부를 정리한 글이다. ㆍ[인천의품격] 한국 박물관의 길을 연 우현 고유섭ㆍ[인천의품격] 국내 최초 공립박물관 개관 '석남 이경성’ㆍ[인천의품격] 추사 이후 최고의 서예가 ‘검여 유희강’동정 박세림. (사진제공 권상호 서예-도정문자연구소 블로그)“스스로 학문과 서예를 수학하다”동정은 1925년 4월 20일 강화도에서 태어났다. 3대 독자로 태어난 그는 가족들의 사랑을 받으며 성장했다. 동정은 6살 때부터 뛰어난 서예가인 할머니에게 천자문과 한글, 동몽선습(조선시대 아동용 교재)를 배웠다. 동정의 부친은 독립운동가다. 그의 부친은은 향토사 ‘강도지’를 저술할 만큼 당대 문호로서 시문에 능했다.동정이 8살이 되던 해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동정은 부친을 따라 한문과 서예 학습을 시작했다. 인천 해성중학교(인천남중학교)에서 현대적인 학문을 접하며 공부했다. 하지만 동정 나이 15살, 매정하게도 부친마저 세상을 작고했다.동정은 이에 굴하지 않고 사숙(私淑, 어떤 사람의 가르침을 받지는 않았으나 배우고 싶은이의 작품 등을 스스로 익힘)하며 한문과 서예에 정진했다. 당나라 구양순과 안진경의 해서를 주로 연습했다.어린 나이에 이별한 할머니와 아버지의 가르침이 뿌리가 되고 스스로 배우려는 의지가 줄기가 돼 동정의 서예는 피어 올랐다.1947년 동정은 23살에 인천예술인협회 총무부장, 대동서도협회 회장, 대동서도협회 공모전 심사위원 등을 맡았다. 또 문총구국대 인천지무 총부부장을 맡았고 대동서화동연회 사무국장을 7년간 역임했다.동정은 작품 활동도 적극적이였다. 대동서도협회 전람회에 8점, 제1회 대동서화동연회전에 5점, 제2회 전시회에 7점을 출품했다.동정 박세림. (사진제공 권상호 서예-도정문자연구소 블로그) “시암과 검여를 만나며 동정의 서예가 완성되요”동정은 스승 시암 배길기를 만나 큰 변화가 생긴다. 구양순 해서를 위주로 배우며 서예 실력이 빠르게 성장했다. 제2회 국전부터 출품하기 시작해 6회 국전까지 연속으로 입선했다. 7·8회 국전에서 동정은 특선도 이룬다.동정은 서예에 더 집중하기 위해 1954년 서울한의과대학을 중퇴했다.동정은 1958년부터 1960년까지 3년동안 매년 개인전을 개최했다. 그 과정에서 동정은 등석여와 조지겸의 글씨를 익히는 등 자신의 서예 세계를 넓혔다. 특히 검여와 자연스럽게 교류하며 검여의 영향을 받았다. 동정은 검여의 북위풍의 맛을 곁들이면서 동정만의 서체를 완성했다.국전에 8차례 출품한 후 동정은 국전 초대 출품, 대동서예협회전, 대동서화동연회전, 동정서숙전 등으로 성실하게 작가 활동을 펼쳤다.1960년 동정은 제9회 국전에서 문교부 장관상을 수상햤다. 출품작 작풍은 황정견과 구양순의 필의가 가미된 북위서풍 글씨이다. 당시 소전 손재형에게 첨삭지도를 받았다.그밖에도 동정은 인천시 문화상, 경기도 문화상을 수상하고 동정서숙 창설, 인천문총 대표최고위원 역임, 예총 경기지부 부지부장 역임 등 단체 활동도 끊임없이 했다.반야심경(동정, 1973).“조심스럽지만, 과로가 단명의 원인일지도 모를 일이에요”동정은 1965년 예총 경기지부 지부장을 맡으며 많은 심사와 작품 출품으로 바빠진다. 세상에 이름을 떨친 동정은 지부장을 5회 연임하고 대학, 회사, 은행, 방송국 등에 많은 강의 요청을 받았다.같은 해 동정은 서울 종로에 서실을 냈다. 또 인천시사 편찬위원과 경기연감 편찬위원을 역임하면서 제14회 국전 서예분과 심사위원과 제5회 동정서예개인전을 모두 소화했다.동정은 파월장병지원 대책위원, 5.16민족상 이사, 인천시 행정자문위원, 반공연맹 경기지부 운영위원, 인천시 감사장, 민주공화당 중앙위원회 농어촌분과위원 등을 역임하며 정치 행보도 보였다.그밖에 동정서숙을 개칭한 동정한묵회 이사장, 인천문화원장, 국전 서예분과 심사위원장, 강화문화재 고문, 전국문화원연합회 이사, 기서문화 향토사연구회 회장 등을 맡았다.동정은 교육 활동도 힘썼다. 인천교육대학 강사, 인천소년교도소 재소생 서예지도위원, KBS방송국 서예반 지도 강사 등 강의에 나섰고 동정한묵회에서 수많은 제자를 양성했다. 대표적인 제자로 청람 전도진, 송암 정태희를 손꼽는다.동정은 서예 외에도 종교, 문화, 정치, 교육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많은 활동을 했다. 하지만 지나치게 많은 활동을 했던 탓일까. 키 182cm와 몸무게 95kg로 호방하고 건장했던 동정은 1975년 자신의 집 안방에서 돌연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는 51세였다.동정은 해방과 분단, 전쟁 속에서 서예의 맥을 잇고 자신의 제자를 양성했다. 동정 스스로 정리 정돈 하는 깔끔한 성격이 그의 서체에 담겨 있다.이런 동정의 정신을 인천은 품지 못했다. 동정의 제자 청람 전도진이 인천에서 그의 예맥을 계승하고 있지만 인천은 무관심했다. 동정 유족이 동정의 작품과 유품을 인천에 기증하려 했지만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결국 동정의 제자가 교편을 잡고 있는 대전대학교에 동정의 작품과 유품을 기증했다.인천에 국립문자박물관과 시립미술관이 들어설 예정이다. 추사의 예맥을 잇고 한국을 대표하는 걸출한 서예가를 배출한 고장은 인천이다. 검여와 동정은 모두 인천에서 태어나고 자란 대한민국 대표 서예가다. 하지만 두 서예가의 영혼이 찾아와 쉬고, 시민들이 두 사람의 법고창신 정신을 공감할 수 있는 공간이 인천에는 없다.   
2021.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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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품격

[인천의품격] 추사 이후 최고의 서예가 ‘검여 유희강’

10기 송암예술아카데미 ‘인천 근현대 예술인의 삶’3편 권상호 동방문화대학원 교수 ‘검여 유희강’ 강의 인천투데이=이형우 기자 l 인천은 역사적으로 문자와 관계가 깊은 도시다. 인천은 세계 최초 금속활자 ‘상정고금예문’과 강화도 선원사에서 두 번째로 만든 대장경인 재조대장경(팔만대장경)을 간행·조판한 곳이다. 송암 박두성 선생이 한글점자 ‘훈맹정음’을 창제한 곳이기도 하다.이런 역사 맥락에서 인천은 절정의 서예가를 배출했다. 바로 추사 김정희 이후 최고 서예가로 평가받는 ‘검여 유희강’ 선생이다.권상호 동방문화대학원 교수가 주관한 송암예술아카데미 ‘인천 근현대 예술인의 삶’에 출연해 인천 서예의 봉우리 검여 유희강 선생의 삶을 얘기했다. 아래는 강의 내용 일부를 정리한 글이다. ㆍ[인천의품격] 한국 박물관의 길을 연 우현 고유섭ㆍ[인천의품격] 국내 최초 공립박물관 개관 '석남 이경성'검여 유희강 생가“서예와 회화를 함께 공부하며 자신의 서풍을 다듬다”검여는 1911년 5월 22일 경기도 부평군 서곶면 시천리(현재 인천시 서구 시천동) 57번지에서 태어났다. 검여가 태어난 지 28일이 되던 날, 그의 부친이 작고하는 바람에 검여는 큰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으며 성장했다.4살 때부터 한문을 익힌 그는 일찍이 서예의 토대를 닦았다. 검여는 1934년 명륜전문학원(성균관대학교)에 입학하고 1938년 중국으로 유학을 가는 등 새로운 학문을 배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검여는 중국에서 8년동안 서화와 금석학, 서양화를 공부했다. 이 시기는 검여만의 특성을 만든 중요한 시기다. 검여만의 북위해서 서체와 회화적인 공간 구성은 이때 연구하며 만들어졌다.검여는 해방 이후 1946년 귀향해 인천에서 본격적으로 예술 활동에 참여했다. 많은 예술단체를 조직하고 중책을 맡았다. 대표적으로 국전 초대 작가와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다. 석남 이경성의 뒤를 이어 2대 인천시립박물관 관장을 7년동안 맡았다.제1회 서도예술전에 생애 첫 서예 작품을 출품했다. 인천문총이 주최한 3회 미술전에는 양화와 서예를 동시에 출품했다. 2회 국전에는 첫 작품으로 ‘념’과 ‘고시’를 출품해 입선했다.1956년 2회 인천시문화상에 유화를 출품해 미술부문문화상을 수상했고, 6회 인천미협전에도 유화작품을 출품했다. 총 유화작품 22점을 출품했다. 검여는 이 시기를 기점으로 검여는 서예에만 몰두했다. 검여는 국전에 초대작가로 등장하며 두각을 나타냈고, 심사위원으로 활동하며 후대를 양성했다. 검여는 국전에 모두 초대작가로 12번, 심사위원으로 6번 참여했다. 검여 유희강“추사 김정희 이후 최고의 서예가”검여는 자신의 작품을 국전에 출품하며 서예가로서 활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검여는 송나라 황정견과 소동파, 청나라 등완백과 조지겸, 조선 말기 김정희 등 여러 서예가들의 서예를 연구하고 공부했다. 이 과정에서 전서와 예서, 해서와 행서 등 다양한 서체를 실험적으로 학습했다.검여는 서예가로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했다. 1956년, 1957년 각각 5, 6회 문교부장관상을 연속으로 수상했다.검여는 1959년 인천 은성다방에서 1회 개인전을 개최했다. 검여의 여러 서체가 담긴 50여 점을 출품했다.검여는 국전 특선, 문교부장관상 연속 수상, 국전 추천작가, 초대 작가 심사위원 등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며 세상에 이름을 떨친다. 특히 2회 개인전에서 소위 검여체라 불리는 ‘북위해서’ 풍의 행서를 보여주기 시작했다.중후하고 질박함을 보여준 절정기를 보여준 검여는 반신불수로 오른손을 사용할 수 없게 된다.제1회 검여 유희강 개인전. (사진제공 권상호 서예-도정문자연구소 블로그)“검여, 정신력으로 육신의 고통 극복하다”검여는 1968년 9월 7일 새벽 뇌출혈로 쓰러져 의식불명에 빠진다. 2주 만에 깨어났지만 오른쪽 반신불수와 실어증 증세로 더 이상 서예가로 활동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른다.하지만 검여는 포기하지 않았다. 제자들의 적극 권유로 검여는 왼손으로 서예를 시작했다.한쪽에만 날이 있는 칼은 도, 양쪽에 날이 있는 칼은 검이라 부른다. 유희강의 아호 ‘검여’의 검이 칼 검이다. 아호에 담긴 운명처럼 검여는 양 손을 사용한 서예가로 부활했다.검여는 1969년 4회 한국서예가협회전에 첫 왼손 작품을 출품했다. 1970년 국전 초대작가로 왼손 작품을 출품했다. 1973년 서울화랑에서 상형문자를 위주로 한 4회 개인전을 개최했다. 1975년 5회 개인전인 ‘검여 유희강 좌수전’을 열고 ‘검여 유희강 서예집’을 출간했다.이색 '홍시자가' 검여의 좌수서.검여의 강인한 정신력도 하늘의 뜻을 이길 순 없었다. 1976년 10월 16일 절친한 화가 배렴의 사망 소식을 듣고 제문을 쓰다가 17일 새벽 고혈압에 의한 뇌출혈증이 재발했다. 의식불명에 빠진 검여는 한마디 유언도 없이 18일 운명했다.검여의 사후 그를 추모하는 사람들이 전시회 등을 열며 검여를 기렸다. 2006년 서거 30주년이 되는 해 검여의 뜻을 잇는 후학들이 모여 ‘시계연서회’를 만들었다. 시계연서회는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에서 시계서회전을 개최해 그를 기렸다.같은 해 인천문화재단이 ‘인천 문화예술 대표인물 조명사업’ 인물로 검여를 선정하고, 검여 서거 30주년 기념 특별전을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에서 개최했다.검여의 유족들(유환규, 유소영, 유신규 등)은 2019년 성균관대학교 박물관에서 검여 유희강 특별전시회를 열었다. 또한 작품 400점과 습작 600점, 생전에 사용했던 벼루, 붓 등을 조건 없이 기증했다.검여의 작품을 검여의 출생지인 인천이 수장고가 없어 한 점도 품지 못한 게 두고두고 아쉬운 대목이다. 검여의 생가가 있던 서구 시천동 아라뱃길 매화동산에엔 검여 선생의 생가만이 봄 햇살을 맞이하고 있을뿐이다. 
2021.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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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논단 - 예술작품은 무엇을 먹고 사는가 2021. 2월호

2021. 2월호
2021.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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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 노동과 휴식

2021. 1월호
2021.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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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 소수민족 축제 사로잡았다” - 서북미문화재단의 화려한 춤 ‘압권’(기사 찾기)

http://munhwai.com/news/view.html?skey=%BF%F6%BD%CC%C5%CF%C1%D6&page=37§ion=237&category=244&no=1858도정 권상호가 빚어낸  서예 ‘신비’장희숙 무용단원들의 북 연주 ‘감명 한국문화가 타코마 최대의 축제인 ‘제25회 소수민족 축제’를 사로잡았다. 지난 30일 타코마 다운타운 라이트 공원에서 개최된 축제에는 84개국 소수민족들이 참여, 어머니 나라의 춤과 음악, 음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부스가 마련됐다.  서북미문화재단(단장 안경숙) 단원들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매인 무대 위에 오른 38개 팀 가운데 가장 많은 박수갈채를 받았다. 화려한 의상으로 차려입은 단원들은 주로 국악으로 연주된 복음 성가에 맞춰  부채춤과 화관무 등을  선사, 관람객들로부터 큰 박수를 받아 사회자가 안경숙 단장을 무대로 다시 초대해 인터뷰와 함께  앵콜 무대를 요청하기도 했다.  2년 전에 이어 이번 소수 민족 축제 참가를 위해 한국에서 온 도정 권상호 씨는 흰 한복 사하의에 흰 모자까지 눌러 쓴 채  수십 미터에 달하는 종이 위에 대나무와 영문 한글 등을 거침없이 써내려갔다. 축제 마당에 구경 나온 어린이에서 어른에 이르기까지 수십명에 달하는  시민들이 권 씨의 그림과  글씨  쓰는 모습에 신비로운 눈길을 보내는 등 단연 인기였다. 수백 명의 시민들은 권 씨가 서북미문화재단의 춤으로 시작한 ‘팀 코리아’ 소개에 이어 춤사위가  벌어지자  여러 명의 한인들과 함께 영문과 한글로  ‘코리아 웨이브. 축 제25회 소수민족 축제’및 그림과 글이 곁들인 수십 미터에 달하는 종이를 들고 퍼포먼스를 펼치자 환호성과 함께 큰 박수갈채를 보냈다. 장희숙 단장이 이끄는 북춤과 장구춤 역시 시민들로부터 아낌없는 박수갈채를 받았다.  시민들은 장 단장의 숨돌릴 틈없는 대북 연주에 이 단원들이 연주하는 북 연주에 담긴 한국의 소리에 심취, 큰 감명을 느끼는 표정이 역력했다.  워싱턴주 대한부인회(회장 영숙 고링)의 음식 부스에서는 성정하상한인성당 교우들이 나와 불고기와 잡채, 만두 등을 판매했다. ‘코리아의 맛’을 음미하기 위해 미국인들은 식품 위생국에서 음식 판매 허락이 시작되기  전부터 줄을 서서 기다리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도정 권상호 서예 및 서화가는 “2년 전에 왔을 때도 많은 사람들이 나의 퍼포먼스에  상당한 관심을 기울였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며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림과 글을  통해서 한국의 문화를 간단하게나마 선보이고 맛을 보였다는 것에 만족한다” 고 했다.  김정태 munhwausa@gmail.com    
2020.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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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오늘의 오감으로

오직 오늘의 오감으로도정 권상호입술을 동그랗게 하고 /오/라고 발음해 보세요. ‘오늘도 OK!’. 모두 옳았어요! All right!표현의 주체인 나도 ‘吾(오)’로 발음합니다. 과거와 미래의 중간에 ‘오늘’이 있고, 우리는 죽을 때까지 ‘오늘’만 살다가 갑니다. 하루의 중간은 ‘午時(오시)’, 숫자 1~10의 중간도 ‘5’입니다. 河圖(하도)와 洛書(낙서)의 중간 숫자도 ‘五’이죠. ‘吾’를 중심으로 八方(팔방)과 八字(팔자)가 둘러싸고 있고, 숫자 ‘5’를 중심으로 여덟 개의 숫자가 음양으로 갈마들며 둘러싸고 있습니다. 팔도강산이나 팔방미인도 여기에서 나오지요. 悟得(오득)하셨나요?한글 ‘오’자는 대지 한가운데에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사람의 모습으로, ‘ㅗ’는 대지 위에 솟아나는 새싹의 모습으로 보입니다. 도전하는 사람, 또는 움트는 창작 의욕의 이미지로 다가오지 않습니까?서예창작은 일반적으로 3단계의 과정을 거칩니다. ‘무엇을 쓸 것인가’ 하는 選文(선문) 과정, ‘어떤 서체로 쓸 것인가’ 하는 選體(선체) 과정, ‘어떻게 구도를 잡을 것인가’ 하는 章法(장법) 과정 등이 그것입니다. 먹빛, 붓맛, 자형, 구도 등 귀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가장 소중한 것은 아무래도 내용(contents)일 것입니다. 내용은 ‘選文(선문)’과 관련이 있고, 최고의 선문은 ‘作文(작문)’입니다. 글씨 좀 못쓰면 어때요? 고슴도치도 제 새끼가 제일 곱다고 하듯이 잘못 지어도 ‘자기 글(吾文)’, 잘못 써도 ‘자기 글씨(吾書)’가 최고지요.서예에서 九宮紙(구궁지) 중심에는 항상 표현의 주체인 ‘吾’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글자에는 표현을 뜻하는 口(입 구)가 들어있지요. 그럼 무엇을 표현해야 할까요?첫째, 남의 얘기는 말고, ‘나의 이야기를 쓰자’는 것입니다. 붓을 내 몸이라 생각하고 나의 정체성(identity)을 찾아 ‘오직 吾人의, 오로지 오늘의 오감을’ 표현해 보자는 것이죠. ‘오감’은 ‘五感(오감)’이기도 하고 ‘吾感(오감)’이기도 합니다.나의 이야기를 쓰기 위해서는 ‘생각의 근육’이 필요합니다. 육신의 근육에서는 힘이 나오지만, 생각의 근육에서는 창작(creation)이 나옵니다. 좀 부족하더라도 나의 생각, 나의 느낌, 나의 상상을 글로 쓸 때, 생동감이 넘칩니다.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르는 글을 한글세대가 보고 좋아할 리 없습니다. 물론 ‘읽는 서예’가 ‘보는 서예’로 바뀌었다고 강변할 수는 있지만요.둘째, ‘오늘의 이야기를 쓰자’는 것입니다. 백년 후의 사람들이 컴퓨터 시대를 살아간 나를 보고 ‘저 사람 조선시대 사람 아니야?’ 라고 비웃을 일을 생각하니 쪽팔리지요.책을 읽거나 영상물을 보다가 ‘이것이다’ 하고 메모해 두기도 하고, 경전이나 시집에서 내용을 가져오기도 하지만, 이는 결국 완전한 내 것이 아니라 남의 생각이죠. 엄밀히 말하자면 지적재산권 침해에 해당합니다. 백운 이규보는 이를 두고, 서툰 도둑이 옛사람의 뜻을 몰래 훔쳐 가는 拙盜易擒體(졸도이금체)라 했답니다.옷을 만들려면 옷감이 필요하고, 요리를 하려면 식자재가 필요하듯이 글을 쓰려면 글감이 필요합니다. 붓을 잡게 하는 동인(motive)은 항상 글감에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 동기유발이 중요하듯이, 서예도 ‘붓 꼴림’을 불러일으키는 글감이 있어야 걸작이 탄생할 수 있습니다. 최고의 글감은 시대성과 현장성을 지닌 글감입니다. 이러한 싱싱한 글감으로 요리한 작품이라야 비로소 창조성과 역사성을 지닐 수 있다고 봅니다.예술가는 시대의 대변자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은 코로나19 시대입니다.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면서 코로나를 배제한 글은 죽은 글이나 다름없습니다. 격리 상태에서 ‘나의 이야기’ ‘오늘의 이야기’를 자기 방식대로 창작하여, 소셜 미디어(social media)로 공유하며 즐길 때, 진정한 시대성이 있는 이 시대의 서예가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글씨를 쓰는 과정은 잠시도 멈출 수 없는 무용이나 음악과 같은 긴박한 시간예술이지만, 그 끝은 언제나 그림이나 조각과 같은 공간예술로서 영원한 결과물로 남는다는 데에 서예의 매력이 있습니다. 이것이 부족하나마 오늘도 붓을 잡는 까닭입니다. ​
2020.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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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한국서예가협회전

2020. 8. 25~ 9. 1 서울, 인사아트프라자 갤러리2020. 9. 15 ~ 9. 20 대전, 대전예술가의집
2020.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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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경서예축전

대구경북서예축전- 세계문화유산 등재 기념 2020. 9. 8 ~ 9. 12 (경북도청 동락관)2020. 9. 15 ~20 (대구문화예술회관)
2020.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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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의 서예 아이콘: 학예병진전 - 강암서예학술재단

學藝竝進展- 剛菴書藝學術財團(강암서예학술재단)2020. 9. 10(목) ~ 9. 16(수) 인사동 백악미술관2020. 9. 18.(금) ~ 9. 24(목) 전북예술회관 
2020.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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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도 극복할 9월 서예 아이콘 : 학예병진전 - 강암서예학술재단

學藝竝進展- 剛菴書藝學術財團(강암서예학술재단)2020. 9. 10(목) ~ 9. 16(수) 인사동 백악미술관2020. 9. 18.(금) ~ 9. 24(목) 전북예술회관
2020.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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