Ⅳ. 結論
秋史는 書․詩․畵․篆刻 뿐만 아니라 紙․筆․墨․벼루 등 文房具는 물론이고 모든 古美術品 鑑定에도 一家를 이루었다. 그래서 지금 예산 秋史의 묘소 앞에 있는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傳說的인 사실이 적혀 있다.
어떤 사람이 작은 칼을 하나 구해다 秋史에게 바치니 선생은 천 냥을 상으로 주면서 말하기를 ‘이는 옛날 玉刀다’라고 했다. 훗날 제자 김석준에게 연경에 가서 이것을 팔아 책을 사오게 하니 책 만 권 값을 받았다고 한다.
추사가 20代에는 明의 董其昌, 文徵明의 서법을 학습하고 中年(연경 이후)에는 翁方綱과 東坡와 米芾의 서체를 학습하였으며, 歐陽詢, 褚遂良의 서체를 학습하고, 나아가 漢碑를 통한 隸書의 眞髓를 연구 하였다.
조선의 朴齊家 등의 북학파가 받아들인 것은 바로 淸朝의 현실적이며 고증적인 학문의 경향이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秋史가 출현하여 學藝一致의 이상적 경지에 도달함으로써 書藝를 순수한 예술로 승화시킨 것이다. 그러나 書藝사상 그 절정을 이루는 秋史體의 성립은 결코 秋史의 천재성에만 기인했던 것은 아니었다.
秋史는 기질적으로 執念과 熱情이 대단하였을 뿐 아니라 完壁主義者였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그냥 넘어가지 못했고 궁금한 것이 있으면 끝까지 찾아내고야 말았다. 眞興王巡狩碑를 찾아내는 집념, 후배 尹定鉉에게 30년 만에 써준 횡액작품, 中國 阮元의『皇淸經解(황청경해)』1400권을 끝내 구해오고야 만 것, 벼루 열 개를 밑창 내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든 것, 일껏 써놓은 저서를 몇 차례 불태워버렸다는 것, 제자들에게 九千九百九十九분을 얻더라도 나머지 일분까지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친 것, 좋은 글씨를 쓰기 위하여 紙․筆․墨을 철저히 가려 쓴 것 들을 보면 알 수 있다.
또 秋史는 자신이 體得한 學藝의 成果(지식)를 世上에 널리 알리려는 社會的 責務를 다하고자 했다. 그는 오규일에게 보낸 편지에서 ‘알면 말하지 않은 것이 없고, 말하면 다하지 않은 것이 없다(知無不言 言無不盡)’고 말했다. 그리하여 秋史는 自身이 追求하는 學文과 藝術을 함께 할 수많은 벗과 제자들로 ‘秋史 一派’의 ‘완당바람’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러나 ‘알면 말하지 않을 수 없다’는 곧은 성미 때문에, 매사에 是是非非를 확실하게 따짐으로써 수많은 적을 만들어내 끝내는 남쪽으로 귀양 가고 북쪽으로 유배하는 苦草를 겪어야 했던 것이다.
秋史는 많은 글씨를 썼고, 또 글씨는 점점 변해 갔다. 특히 제주도 流配時節에 위로는 임금에서부터 아래로는 제주의 관리까지, 멀리는 中國 燕京에, 가까이는 집안의 兄弟와 벗들에게서 끊임없는 요구를 받고 언제나 글씨를 쓰면서 귀양살이를 했다. 종이와 먹이 넉넉지 않아 맘껏 試筆을 하기 어려운 때도 있고 몸이 아파 편지조차 못 쓸 때도 있고, 사리에 맞는지 고전에 어긋남이 없는지 확인해 볼 文獻資料가 없어서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秋史의 예술이 晩年에 이를수록 單純하고 淡白하며 거짓 없고 꾸밈없는 平凡性으로 歸着된 事實을 생각할 때, 그런 人生과 藝術의 得道는 어쩌면 제주 유배에서 시작하여 북청에서 심화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秋史의 書藝觀은 淸代에 유행했던 棄帖學, 崇北碑에 따른 書道의 氣風과 脈을 같이 하지만 그는 銳利함․힘참․古拙함이 지니는 아름다움을 추구함과 동시에 매우 力動的이고 個性的인 野逸한 풍격의 書藝美를 創出함으로써 淸代의 書藝家들이 이루지 못한 獨自的인 書風을 만들어 냈다. 바로 이러한 그의 書藝家로서의 力量과 成功的인 藝術的 業績을 통해서 秋史書藝의 歷史的 意義와 價値를 찾을 수 있겠다.
논자도 秋史처럼 세상을 떠나기 3일전에 ‘版殿’현판을 썼듯이 죽는 그날 까지 書藝에 深醉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논문을 쓰기 까지 자료구하기와 집안 살림살이에 적극적으로 도와준 고마운 남편과, 엄마 노릇을 제대로 못해 미안한 아들에게 영광을 돌리며, 제 맘속에 맴돌고 있는 몇 분의 교수님들께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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