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릉비:장수왕 3년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능과 함께 국내성 동쪽 언덕(현재 중국 길림성 집안시)에 세운 사면비석이다. 비석은 이수가 없이 대석과 비신으로 이루어졌으며 대석은 길이 3.35m. 너비 2.75m이고 비신은 너비 1.35m. 높이 6.39m에 이르는 동양최대의 비석이다. 비신의 4면에는 44행 1,775자의 문자를 10에서 15cm 정도의 크기로 음각하였는데, 글씨의 간격을 고르게 하기 위하여 모눈종이처럼 칸을 나누어 놓았다. 이 비석은 조형적 아름다움은 없으나 고구려사 및 동아시아교섭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비석이다. 그리고 광개토왕비는 고구려의 멸망과 만주의 상실로 잊혀져 있다가 조선 세종조에 편찬된 용비어천가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고려말 조선초에 알려지게 된다. 그 후 비석은 1880년경 청나라 농부에 의해서 재발견되어 연구가 이루어 지고 있다. 자연풍화에 의한 마모와 1882년 경 만주를 정탐여행중이던 일본군 중위 사까와 카게노부에 의한 악의적인 비문의 변조. 무분별한 탁본. 보호관리의 잘못으로 훼손이 많이 되어 과학적인 보호대책이 시급하다. 능비의 발견으로 한.중.일 학계의 관심이 집중되었으나, 고구려사나 동아시의 교섭사 연구보다는 일본측이 식민사관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비문을 조작. 오독하여 "일본이 369년 가야를 정복하고 200여년 동안 지배하였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함으로 그에 대한 소모적 논쟁이 주로 이루어 졌다.

 

동북공정(東北工程) :고구려를 중국역사에 편입하려는 중국의

                               중국의 계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