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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공간, 인간 = 삼간(三間)

 

도정 권상호

  초대장을 받아보면 반드시 일시와 장소가 씌어져 있다. 이 둘 중에 어느 하나만 없어도 우리는 행동으로 옮길 수 없다. 순우리말로 때와 곳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때와 곳이 없는 인간의 약속은 없다. 제법 분위기 있는 한 친구는 ‘좋은날’, ‘좋은곳’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시간(時間)과 공간(空間)의 좌표가 설정되어야 분명한 약속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시간, 공간이라고 할 때의 ‘간()’자를 ‘인간(人間)’에게도 왜 붙였을까. 시간과 공간 앞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인간은 한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그 어떠한 물상도 마찬가지지만 인간 역시 시간과 공간의 굴레를 벗어나서는 삶을 영위할 수 없다. 시간과 공간, 곧 시공을 극복하기 위한 인간의 노력은 유사 이래 지금도 이어지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축지법(縮地法)에 대한 염원을 낳았다고 볼 수 있다. 전화, 텔레비전, 자동차, 비행기는 물론 인터넷, 인공위성 등도 축지법 실현을 위한 노력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시공을 극복하고자 노력해 보았자, 우리의 삶은 영원한 시간 속의 무지 짧은 인생이요, 무한한 공간 속의 너무나 좁은 육신에 불과하다. 이를 어찌할 거나! 영원한 시간과 무한한 공간에 비하면 인간의 존재는 너무나 보잘것없다. 하이데거가 아니라도 실존(實存)의 문제에 대하여 심각하게 사유하지 않을 수 없다.

  45억년의 지구 역사를 하루 24시간에 비유하면 인간은 자정 1 17초 전에 세상에 나타났고, 이 중 호모사피엔스 시대는 불과 3초밖에 되지 않는다니 참으로 인생무상(人生無常)이라 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역사 시대는 1초도 안 되는 너무나 짧은 시간의 기록이라니 이 글을 쓰는 자체도 무의미한 짓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너무 실망할 필요는 없다. 인류는 예술(藝術)과 종교(宗敎)라는 이름으로 이를 극복하고 있다고 본다. 예술은 가시적인 활동으로 시공을 극복하게 해 주고, 종교는 불가시적인 영적인 것으로 시공의 무한을 제공한다. 내가 쓴 시와 글씨가 비록 하찮은 예술품일지라도 내 손을 떠나 먼 곳에 존재할 수도 있고, 죽은 뒤에도 세상에 머물러 있을 수 있다. 내 육신의 또 다른 모습이 DNA암호를 갖고 자손에게 남아있듯이 내 영혼의 또 다른 모습은 예술이란 이름으로 길이 세상에 전해지는 것이다. 나는 시공을 초월하게 해 주는 나의 예술, 서예를 몸서리치게 사랑한다. 먹을 믿고 따르는 걸 보니 신묵교(信墨敎) 교주라도 된 느낌이다.

  오늘은 시간, 공간, 인간을 삼간(三間)이라 명명하고 붓으로 시공인간(時空人間) 네 글자를 옛 글씨체로 써 보았다.

  낯선 시() 자는 시()의 갑골문 형태이다. () 자의 윗부분 지()는 지()의 고형으로 ‘간다’는 뜻이고, 아랫부분은 일()로 태양을 나타낸다. 곧 시간이란 개념은 ‘태양의 운행’에서 비롯되었는데, 나중에 ‘헤아린다.’는 뜻의 촌() 자가 덧붙어 시()가 탄생한 것이다. ‘태양의 운행을 헤아린다.’는 뜻이다.

  () 자의 윗부분은 ‘굴’을 뜻하는 혈()이고, 아랫부분은 이 글자의 음을 표시하는 공()자이다. 공간이란 전후좌우의 넓이에 높이를 더한 3차원의 개념이다. x, y 평면좌표에 h라는 높이좌표를 더하면 완벽한 공간 개념이 선다. 광년을 따지지 않더라도 정녕 무한한 공간이다.

  ()의 갑골문 형태를 보면 팔을 드리우고 직립하고 있는 사람의 측면 모습이다. 인간은 대지를 굳게 딛고 서서 머리는 하늘로 두고, 팔의 자유를 얻는 순간부터 문명의 급속한 발달을 가져왔다.

  마지막으로 간()의 원형은 대문 위에 뜬 달의 모습인데, 실은 대문 틈새로 비집고 들어오는 달빛의 의미에서 ‘틈새’, 곧 ‘사이’라는 의미를 갖게 되었다.

  인간이란 시간과 공간에 비하면 게임이 안 될 정도로 생은 짧고 몸은 작다. 하지만 생각하는 동물, 호모사피엔스이다. 생각 끝에 시간 공간 인간을 함께 삼간(三間)이라 명명한다. 인간이여, 그대가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이라면, 그 시간 즐겁고, 그 공간 아름답게 꾸려 나가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