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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는 조캉사원 옥상에서의 정경
* 아래는 세라사원 경내에서 문답하는 어린 승려들
제3일 - 7월 17일(월)
라사에서 처음 맞는 아침은 두통의 연속이었다. 더러는 소화가 되지 않고 열이 나며, 더러는 관절이 아프다고 했다. 기압의 차이로 준비해 온 라면 봉지가 핸드볼처럼 빵빵해져 있었다. 과자 봉지는 물론 먹물통 등 밀폐된 용기는 모두 폭발 직전이었다. 가위질로 구명을 내거나 뚜껑을 열어서 기압조절을 했다.
미음을 끓여 고추장으로 겨우 아침을 때우고, 아침의 조캉사원을 다시 한 번 둘러보기 위해 길을 나섰다. 淸淨無垢한 하늘에 무심히 흐르는 祥雲을 바라보며 조캉사원 앞 광장을 걸었다. 시의 중심가에 있으며 7C에 세워졌다. 티벳에서 가장 오래된 불교사원으로 당나라 건축양식에 네팔과 인도의 예술적 특색이 엿보인다. 아울러 조캉사원은 위에서 보면 불교적 만다라식 우주관을 실현했다고 볼 수 있다.
주요 전당의 복도에는 장족의 역사와 신화가 반영된 벽화가 채색되어져 고색창연하고 대전의 한가운데는 唐의 문성공주(文成公主)가 서안에서 가져온 12살의 석가모니 도금 동상이 안치되어 있다. 양측에는 쏭찬깐포(松贊干布)와 문성공주, 네팔의 자존공주(赤尊公主) 등의 조각상이 있다. 티벳왕국의 창건자인 쏭찬깐포(松贊干布)는 시조 닝치찬포(聶墀贊普)로부터 계산해서면 32대 찬포이다. 31대 남리롱찬(囊日論贊)의 아들인 쏭찬깐포는 617년에 찬포에 올라 새로운 형태와 질서를 갖춘 티벳왕국을 세운다. 찬포(贊普)는 티벳어인 찬포(btsan-po)의 음역이다. 그 뜻은 ‘웅강(雄强)한 남자’ 곧 씩씩한 남자의 뜻으로 티벳의 군주를 호칭한다.
그런데, 한편으로 중국 학자들은 예부터 한족(漢族)과 티베트 민족이 "장인과 사위 관계였다"는 봉건적인 주장을 펴고 있다.
"당태종이 문성공주(文成公主)를 토번왕국 임금 쏭찬깐포(松贊干布)에게 시집보낸 뒤, 한족과 티베트 민족은 장인과 사위 관계가 되었다."
이는 분명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문성공주는 가짜공주다. 당태종이 토번왕국의 군사위협에 굴복하면서 급조해 시집보낸 가짜공주인 것이다. 설령 문성공주가 진짜공주라 하더라도 과거 봉건왕조의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오늘날의 현실을 합리화시키려는 이런 식의 접근은 말이 안 되는 것이다. 고려는 한 때 원나라의 부마국이었다. 그런데 이를 근거로 현재의 대한민국이 몽골 또는 중국의 일부라 주장한다면 너무나 황당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송찬깐포와 결혼한 또 다른 사람이 있다. 브리쿠티라(자존공주)는 네팔공주다. 중국학자 논리대로라면 네팔도 티베트에 대해 역사적 권리를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조캉사원 4층 꼭대기를 올라가면 황금빛 지붕을 접하게 되는데 멀리 포탈라궁과 푸른 하늘에 점점이 뜬 조각구름은 신비로움을 더해 준다. 이에 못지않게 조캉사원 앞에서 오체투지를 하는 티베트인의 불심으로 가득 찬 눈빛을 보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반질반질한 돌바닥에 손바닥이 스치는 소리를 내며 엎드리는 티벳들을 보노라면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마침 붉은 가사를 두른 고행중인 텁텐체랑(Thupten Tseraing) 스님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담벼락과 비석 및 마니차 주변 등 여기저기 쓰인 글씨들이 ‘옴마니반메훔’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막간을 이용해 붓을 꺼내어 마니차를 돌리는 할머니를 스케치하기도 했다.
生宗一致. 삶과 종교가 구분되지 않은 삶 그 자체가 종교라 생각된다.
오후에는 세라사원(色拉寺)에 들렀다. 라사시 전체로 보면 북동쪽, 조캉사원에서 보면 정북쪽 끝에 위치한 세라사원은 사원 자체가 하나의 독립된 타운을 형성하고 있었다. 1419년에 창건되었으며, 티벳의 ‘少林寺’로 불리기도 했다. 티벳력 12월 27일에는 세라뻥친절(色拉崩欽節)로서 각지에서 무수한 신도가 운집한단다. 세라사원의 가장 유명한 볼거리는 불경토론인데, 오후 3시부터 한 시간 동안 넓은 마당에서 펼쳐진다. 조용하던 경내가 떠나갈 듯, 시끌벅적한데, 그 이유는 1:1로 물음에 답하는 동작이 무협적이기 때문이다. 큰 소리로 대답하며, 발을 구르고 손뼉을 치며 한 손을 내뻗는 동작의 연속인데 무슨 내용을 말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사뭇 진지함을 잃지 않고 있다.
내일 그 유명한 티벳의 얼굴, 포탈라궁을 구경하기 위해 예매하러 갔으나, 멍청히 1시간 가량 줄만 서 있다가 잘렸다. 내일 새벽 5시에나 와서 줄을 서야 예매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는 수 없이 내일로 미루고 포탈라궁 앞 언덕이 오르기도 하고, 광장을 걷기도하며, 마니차와 종을 사는 대신에 아줌마를 모델로 사진 촬영에 열중했다. 카메라만 둘러대면, 아이들은 ‘스위트(사탕)’ 타령, 어른들은 돈 타령이다. 그 옛날, 머리카락 속의 서캐처럼 聖스런 공간 속에 俗物들이 왜 그리도 많은지......
뽀개지는 아픔을 잊기 위해, 저녁에는 호텔 로비에 나와 붓글씨를 쓰곤 했다. 書魔를 통하여 고소증의 아픔을 잊기 위해서다.
------------------------------------------ 퍼온 글(참조) ---
여기에서 티벳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자.
* 세계의 지붕 티벳. 하늘을 찌를 듯이 솟은 거대한 만년설. 끝없이 펼쳐지는 꼬불꼬불한 산 길. 칠흑 같은 밤의 정적. 티벳은 이곳을 찾는 모든 여행객들을 그 ‘원시의 순결’로 주눅들게 한다.
그러나 이 대자연 속에는 질곡으로 가득한 파란만장한 티벳의 역사가 있다. 티벳이 중국의 일부냐 독립국가냐 하는 해묵은 역사논쟁의 시발점은 7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중국은 당나라였고 티벳은 토번제국이었다.
당의 태종이 문성공주를 토번임금(松贊干布)에게 시집보낸다. 이를 두고 티벳은 ‘화해’로 해석하고 중국은 토번이 당의 선진문물을 배우기 위해 장인-사위 관계를 자청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토번 왕국 붕괴 후 400여 년간 분열을 거듭한 티벳은 원(元)대에 이르러 불교지 도자가 몽골을 대신해 통치하는 정교합일의 독특한 정치체제를 유지하다가 18세기에 다시 청의 지배하에 놓인다.
그 후 불어닥친 제국주의의 광풍. 영국과 중국이 주도권을 다투면서 티벳에서는 독립운동이 본격화됐다. 독립운동의 불길은 1940년대 다시 살아났으나 이를 빌미로 중국은 티벳을 손아귀에 넣게 된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미국과 UN의 관심이 한반도에 쏠려 있는 사이 중국군은 티벳을 침공했다. 중국은 티벳의 동쪽 경계였던 금사강(金沙江)을 건너 창도(昌都)를 점령했다. 티벳은 UN에 대표단을 보내 지원을 호소했다. 그러나 UN과 미국은 한국전쟁 때문에 여력이 없었다. 더욱이 한반도는 공산주의를 억 제하는 교두보라는 인식이 있었으나 티벳은 전략적 가치가 크지 않다고 판단했다. 결국 티벳은 중국의 행정구역으로 편입됐다. 승자의 기록에 묻혀버린 것이다.
■후진타오, 티벳 독립운동 진압 후 인정받아■
티벳에도 3·1운동 같은 게 있었다. 중국 강점 10년째인 1959년 3월 대규모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중국은 무자비하게 티벳을 탄압했다. 일부 인사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티벳 전체인구의 6분의 1인 126만명이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1980년대 들어 중국에 개혁·개방의 물결이 불어닥치면서 티벳에는 다시 한 번 소용돌이가 친다. 이번에는 미국이 티벳의 전략적 가치를 간파했다. 티벳은 미국에게 있어 강대국으로 부상하는 중국을 견제할 수 있는 좋은 재료였다. ‘티벳 카드’를 중국 압박의 수단으로 활용한 것이다.
노벨평화상을 받은 달라이 라마가 그 중심에 있다.
티벳의 심장에 해당하는 도시가 라싸(拉薩)다. 이 라싸에서 칭하이(靑海)성의 거얼무(格彌木)를 잇는 장장 1142㎞의 칭장(靑藏)철도 2단계 구간이 최근 모두 완공됐다. 지난 2001년 6월에 착공돼 4년여동안 우리나라 돈으로 약 3조1200억 원의 건설비가 투입된 칭장철도 2단계 구간은 티벳의 중심인 서장자치구를 관통하는 서부대개발사업의 핵심 프로젝트였다.
서부대개발이라는 미명 하에 중국이 이렇게 험한 지역에 고원철도를 깐 이유를 알만하다.
바로 티벳에 대한 장악력을 높이자는 것이다. 국제적 논란을 불식시키고 티벳은 확실한 중국땅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선포하겠다는 것이 바로 중국의 속셈이다.
특히 후진타오 주석의 ‘티벳 야심’은 남다른 데가 있다. 후진타오는 지방 관료로 정치계에 입문한 인물이다. 그가 중앙권력으로, 그것 도 핵심으로 부각될 수 있었던 계기가 다름 아닌 티벳이었다. 후진타오가 티벳 자치정부 총서기로 재임했을 때 티벳에서는 독립운동이 일어 났다. 당시 후진타오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무력으로 진압했다. 티벳족 간부와 공무원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했다. 문화대혁명을 방불케 하는 처사였다. 이 일로 후진타오는 덩샤오핑, 장쩌민 등 고위층에게 능력을 인정받게 됐으 며 결국 덩샤오핑에 의해 장쩌민의 후계자로 낙점된 것이다.
“영리하지만 과단성이 없다”는 꼬리표가 따라붙었던 후진타오는 티벳 사태 이후 덩샤오핑으로부터 “원칙문제에 있어 입장이 분명한 절대 연약한 사람이 아니다”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티벳은 후진타오의 은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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