暴炎(폭염)
도정 권상호
연일 폭염주의보에서 이제는 폭염경보까지 오르내린다. 暴炎(폭염)이라는 말을 순화하여 ‘불볕더위’나 ‘된더위’라고 해야 더 좋겠지만 여기서는 즐겁게 한자 공부하는 자리니까 용서하길 바란다. 立秋(입추)라는 절후는 아랑곳하지 않고 末伏(말복)을 코앞에 둔 한여름, 아침부터 거침없이 폭폭 찐다. 해란 놈이 우리가 사는 지구의 북반구에서 놀기 때문에 낮은 길고 날씨는 무덥다. 오- 해님, 口業(구업)을 용서하소서. 너무 더워서 해가 밉다가도 들판에서 익어가는 알곡을 생각하면 견딜 만하이. 옳거니, 해는 높은 하늘에 떠 있으면서 누구보다 일을 가장 많이 ‘해내니(do)’ ‘해’라고 하겠구나. ‘달’은 매일 모습을 조금씩 ‘달리하면서(differ)’, ‘달려있을(hang)’뿐이지만…….
폭염의 주연은 해이지만 조연은 인간이다. 오늘은 주연인 ‘해 日(일)’과 관련한 한자들을 살펴볼지니.
文字(문자)라고 할 때, 文(문)은 최초로 만든 상형, 지사와 같은 글자이고, 字(자)는 앞의 文(문)이 둘 이상 모여서 만들어진 글자이다. 文(문)은 214문의 부수를 포함하여 500여 문에 지나지 않고, 대부분의 한자는 字(자)에 해당한다. 한자가 재미있으면서도 쉽다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중에 하나가 '日(해 일)'이란 文(문)만 알면 早(새벽 조), 明(밝을 명), 朝(아침 조), 旦(아침 단), 東(동녘 동), 昌(창성할 창), 暴(햇볕 쬘 폭, 사나울 폭) 등을 비롯한 수십 개의 字(자)도 어느 정도 그 의미를 유추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日(해 일)은 ‘태양, 하루, 낮, 일본’ 등의 의미가 있다. 해의 모양을 나타내는 테두리 안의 一(일) 자는 갑골문 시대부터 있었는데, 이것이 흑점이라는 설, 三足烏(삼족오)라는 설 등이 있는데 이 글자가 처음 만들어진 갑골문 시대의 과학이나 문화로 볼 때 신빙성이 떨어진다. 나는 日月(일월)이라는 단어를 볼 때, 天文(천문) 중에서 첫째가 ‘해’요, 둘째가 ‘달’이라는 의미에서 해와 달의 윤곽 안에 각각 一(일)과 二(이) 자를 붙여놓았다고 믿는다. 一(일)과 二(이)는 홀과 짝, 陽(양)과 陰(음)의 시작 數(수)이다. 낮과 밤을 가리키는 한자어 晝夜(주야)에서 晝(낮 주)와 夜(밤 야)에 각각 숨어 있는 日(일)과 月(월)을 찾을 수 있는가.
여름낮 점심과 새참을 먹을 때 바람은 쐬고 싶으나 햇살은 피하고 싶어 나무 그늘을 찾는다. 여름밤이 되면 모깃불 피워놓고 멍석에 누워 하늘의 달과 별을 보며 어머니의 부채 바람에 잠이 들곤 했다. 그러고 보니 밤낮으로 우리를 감싸고 도는 것이 해와 달과 별들이로구나. 이를 日月星辰(일월성신)이라 하것다.
早(이를 조)의 전서를 보면 아래의 十(열 십)은 甲(갑옷 갑)이었다. 甲(갑)은 사실 갑옷의 모습이 아니라, 씨앗이 갑옷처럼 단단한 껍질을 벗고 싹을 틔우는 모습에서 온 글자이다. 여기에서 甲(갑)은 ‘이르다, 첫째, 새벽’ 등의 뜻을 지니며, 十干(십간)의 첫째도 甲(갑)이다. 따라서 早(조)는 하루의 시작인 ‘새벽’의 의미에서 ‘이르다’의 의미가 나온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 훈련하는 병사들의 옷에 새벽빛이 감도는 모습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감상적이다. 오늘날의 글자 모양으로 보면 막대기 끝에 해가 떠오르는 모습이니 오히려 이해가 쉬울 수도 있다. 예컨대, 早期(조기), 早老(조로), 早熟(조숙), 早春(조춘)이로다.
明(밝을 명) 자를 해와 달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글자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많다. 앞의 日(일)은 본디 창[囧(경)]이었다. 明月(명월), 明朗(명랑)이로다. 사실 해와 달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글자는 朝(아침 조)이다. 더러는 아침에 동쪽 하늘에서는 뜨는 해를, 서쪽 하늘에서는 지는 해를 볼 수 있다. 朝(조) 안에 早(조)가 숨어 있으니 발음은 당연히 /조/이렷다. 朝夕(조석), 朝鮮(조선), 王朝(왕조)로다.
旦(아침 단)은 모양 그대로 지평선 위로 힘차게 솟구치는 태양의 모습이다. 설날 아침을 元旦(원단)이라지. 東(동녘 동)은 솟은 해가 나무 사이에 비치는 쪽으로 보기 쉬우나 원래는 나무와 관계없이 물건을 넣은 자루의 양쪽을 동그랗게 묶은 모습에서 출발했다. 지금도 중국에서는 東西(동서)의 첫째 뜻이 ‘물건’이고 다음 뜻이 ‘동쪽과 서쪽’이다. 東海(동해), 東國(동국), 東方(동방)이로다.
昌(창성할 창)은 갑골문을 보면 분명 해 두 개의 모습에서 비롯했다. 윗부분은 실제의 해이고 아랫부분은 수면에 비친 해이다. 그러나 나중에 모양을 갖춘다고 한 것이 아래 글자를 曰(가로 왈)로 잘못 쓰기 시작한 것이 오늘에 이른다. 수면 위로 떠오르는 해처럼 기세가 크게 일어나 잘 뻗어 나간다는 의미이다. 昌盛(창성), 繁昌(번창)이로다.
뉴스에서 내일도 暴炎(폭염)이란다. 暴(사나울 폭)의 처음 형태는 ‘말리다’의 의미에서 출발하였다. 이 글자의 전서를 보면 ‘日(해 일) + 出(날 출) + 廾(두 손 공) + 米(쌀 미)’로 이루어져 있다. 해가 나오자 두 손으로 곡식을 곳간에서 꺼내어 말리는 모습이다. 이렇게 평화로운 모습의 글자가 어쩌다가 暴行致死(폭행치사), 暴力輩(폭력배), 暴徒(폭도), 暴動(폭동), 暴露(폭로), 暴騰(폭등), 暴落(폭락), 카暴(car폭)처럼 사납게 쓰이자, 본뜻을 살리기 위해 日(일) 자 하나 더 붙여 曝(햇볕에 쬐어 말릴 폭) 자를 만들었다. 발음도 원래 暴惡(포악)에서처럼 /포/ 하며 다소 부드러웠는데, 어느 순간 /폭/으로 바뀌어 아예 폭폭 삶는다. 炎(불탈 염) 자는 보기만 해도 확확 달아오른다.
아이고 더워라. 暴炎(폭염)아 물렀거라. 폭포 爆(폭) 자 瀑布水(폭포수)가 기다리고 있거니.